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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13. 2023

교장선생님께 인사 좀 하고 가라고!

이미 두 번 했는데요?

나에게 교장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은 운동장 전체 조회 시간에 아주 먼 거리에서 얼굴만 언뜻 보였다.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정확히 보게 된 건 초등학교 졸업 앨범 첫 페이지에서였다.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는 사람이자, 나에겐 다가갈 수 없는 너무나 큰 어른이자 권위의 모습으로 비쳤다.


교사에 임용되고 나서 만난 교장선생님은 어릴 적 마음속에 품었던 모습만큼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교장선생님이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질문에 거리낌 없이 내 생각을 이야기하다가 교감선생님이나 다른 선배 교사들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왜 솔직한 내 생각과 의견을 말했는데 자기들이 지적질이지? 몇 년 더 교직에 있어보니 교장선생님에게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당찬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후로 점차 나도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게 장땡이다.


사실 학교에 근무하면서 아주 여러 번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교장, 교감선생님 의전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디 출장 갈 때는 꼭 중형세단급 이상의 자가용을 가진 부장교사의 차로 모셔야 하고, 학교 급식실에서도 대놓고 티 내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관리자용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회식이나 모임을 갈 때도 교장선생님을 누가, 어떻게 모시고 갈 건지 꼭 그전에 논의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교장선생님도 차가 있고, 운전할 수 있고, 심지어 본인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하는데 왜 꼭 이럴 때 누군가가 나서서 모시고 가야 하지?


특히 이런 의전 문화가 심하게 작동될 때는 승진을 준비하는 교사들이 학교에 많이 근무할 때이다. 승진 가산점을 받기 위한 그들의 각고한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로 애처로웠고, 가끔은 남사스럽기까지 했지만, 웃긴 건 결국 통한다는 거였다. 동료교사 피곤하게 하고 학생 수업은 뒷전인데, 승진 관련 업무에만 올인하고 교장, 교감 의전에 만전을 기했던 선생님들은 거의 다 승진에 성공했다. 물론 내 경험의 한계라서 정말 공정하고 합리적인 교직생활을 하면서 승진하신 분들도 계시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다.


딱히 승진에 대한 목표도 없는 나는 그냥 껄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아니, 교장선생님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내 일 처리만 깔끔하게 하려고 했다. 관리자의 눈에 나는 그저 문제없이 돌아가는 공장 컨테이너벨트의 부품 중 하나로 취급되길 바랐다. 쓸데없이 친해지는 것도, 그렇다고 눈에 띄는 행동으로 미움을 사는 것도 경계했다. 적당히 눈치 보면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지내는 게 가장 알맞았다.


특히나 이제 학교 밖을 나오니 교장선생님을 만날 일이 더더욱 없어졌다. 내 일상에 더더욱 만날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주 가끔 만날 일이 생기긴 했는데, 그건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차가운 칼날 같은 바람이 불던 겨울날 녹색어머니회 교통 봉사를 마쳤을 때 교장선생님은 고생하셨다며 인사하셨다. 그의 관리를 받는 일개 교사의 입장이 아닌 학부모의 입장에서 나누는 인사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교장선생님은 굉장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셨다.


학교 행사에 가끔 참여할 때에도 교장선생님을 마주쳤는데 늘 인자한 미소로 학부모를 향해 인사를 해주셨고 나도 편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평생 교장선생님은 학부모 입장에서만 만난다면 좋겠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조금 기분이 상한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날이었다. 전날부터 긴장하고 잔 탓에 아침 알람소리가 울리자마자 일어나서 김밥 쌀 준비를 했다. 요리 솜씨가 영 없기도 하고, 아이도 재료가 풍성하게 꽉 찬 김밥은 잘 안 먹으므로 간단히 꼬마김밥을 싸기로 했다. 말이 꼬마김밥이지, 그래도 김밥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중 하나다. 재료 서너 개만 준비해서 간단하게 싸는 거였는데도 금방 시간은 흘러 8시가 다 되어 갔다. 설거지 거리는 또 어찌나 싸이는 지. 어설프게 김밥을 말고, 옆구리 터지지 않게 썰고, 정리하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시락에 김밥만 싸주면 아쉬우니 돌돌이 롤샌드위치도 곁들이라고 만들어서 넣고 좋아하는 과일까지 싸니 허접한 소풍 도시락 하나가 완성됐다. 설레었는지 깨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일찍 일어난 아이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저번에 소풍 가던 날처럼 꼭 학교 앞에 와서 버스 타고 가는 것까지 봐달라고 주문했다.


외부체험학습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엄마들이 학교에 나와서 아이에게 인사해 주는 일을 그렇게나 좋아하는지 몰랐다. 어차피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지도하에 한 줄로 나와서 바로 버스를 타면 그만인데, 그 짧은 순간 엄마가 나와서 인사도 해주고 잘 가라고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깨가 으쓱해졌나 보다. 그리고 주변 다른 아이들도 "우리 엄마는 왜 안 나왔지? 우리 엄마도 나오면 좋겠다."라고 여러 명이 말하는 걸 들었다. 아이가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서 나도 놀랐는데, 이번에도 또 해줄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그래, 그런 요구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주어줄 수 있지.


김밥 도시락을 싸고 폐허가 된 부엌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챙겼다. 담임선생님도 잠깐이지만 마주칠 거고, 교장선생님까지도 나올 수도 있는데 거지꼴로 나갈 수는 없다. 꾸미지는 않아도 집에서 자다 나온 꼴로 나갈 수는 없으니 대충이라도 사람다운 행색을 갖춰서 나갈 준비를 했다. 버스 탑승 시간이 곧 다가오고 있어서 시간에 쫓기며 뛰어서 학교 앞으로 갔다. 이미 엄마들 몇 명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들은 아침에 김밥 싸느라 몇 시에 일어났는지, 몇 줄을 얼마나 쌌는지 저마다 김밥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일이 분만 늦게 왔어도 놓쳤겠다 싶을 정도로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하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버스 쪽으로 걸어 나왔다. 여러 아이들 사이로 보이는 내 아이와 반갑게 손인사를 나누었다. 표정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버스에서는 누구랑 짝꿍이 되어서 앉을까? 담임선생님은 어떻게 자리배치를 하셨을까?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고 일단 안심하기로 했다. 내 아이 말고도 평소 동네에서 자주 봐서 친숙한 아이들에게도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서도 잘 다녀오라고 마구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은 제 엄마이건 아니 건간에 다들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요즘 관광버스는 선팅도 참 진하게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안에 누가 있는지 우리 애는 어디 쪽인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어디서든 보겠거니 하면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거사를 치르고 끝내고 집에 돌아오려던 찰나였다. 같이 정문에 나와서 배웅하시던 교장선생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사실 맨 처음 나왔을 때에도 인사를 드렸고, 서있는 동안에도 한 번씩 눈이 마주칠 때면 가벼운 목례와 함께 눈인사도 몇 번 드렸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자리를 뜨게 되었을 때에도 "수고 많으십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두 번 세 번 허리 숙여 인사를 드렸다.


이제 신호등을 건너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뒤에서 큰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엄마들, 교장선생님께 인사는 좀 하고 가야지!"


무슨 소리지? 싶어서 뒤돌아 봤더니 대대로 몇 년째 이 학교의 학부모회장직을 맡고 있는 엄마였다. 인사를 드리고 오는데 교장선생님과 회장엄마는 서로 안면이 있는지 더욱 반갑게 인사하며 어떤 현안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듯한 모습이었다. 둘이 뭐 중요한 얘기라도 나누다보다 하고 인사드리면서 왔는데 어느새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갑자기 크게 소리치며 인사 좀 하고 가라는 거다.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허리 숙여 다시 한번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갑자기 그 순간 기분이 묘하면서 황당했다. 아니, 아까 전부터 인사를 몇 번을 드렸는데 대체 왜 또 하라는 거야? 아까 내가 인사하는 걸 못 봤으니 회장 엄마는 인사하고 가라고 대뜸 소리친 거 같긴 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기본 예의범절도 모르는 엄마 취급을 하면서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냐는 뉘앙스로 말하는 건 좀 오버 아닌가?


"뭐야, 아까 분명히 여러 번 했는데 왜 또 하래." 주변 사람들도 들릴 정도로 약간 크게 말했다. 다른 엄마들도 그러게, 하면서 동의는 했지만 뭐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만 이렇게 예민한가? 왠지 모르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억지로 시켜서 한 마지막 인사를 제외하고도 만남에서부터 그 자리에 몇 분 있는 동안 족히 예닐곱번은 인사를 드린 것 같은데 뭘 또 인사를 하라는 건지. 과연 거기에 서 있는 분이 만약 교장선생님이 아니고 평교사 거나, 배움터지킴이 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인사를 시켰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두 손 모아 절이라도 드려나 만족하려나?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건 내가 꼬인 인간 이어서인가? 잘 모르겠다.


피곤했지만 김밥 도시락도 열심히 싸고, 아이들 배웅도 잘 마치고 여러모로 뿌듯한 아침이었는데, 괜히 그 인사건으로 좀 기분이 상했다. 집에 와서도 곱씹어 몇 번 생각하다가 말았는데 아무래도 좀 그 회장엄마가 과한 것 같다. 자기가 교장선생님과 대화하느라 우리가 인사한 걸 놓쳤으면서 왜 그런 거지. 내가 좀 삐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이 조금 과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회장 엄마는 평소에 늘 밝고 인자해서 의지할 수 있는 언니 같은 타입이라 나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딱히 나쁜 감정은 없다. 인사 한 번 더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억울하냐고 할 수도 있는데 왠지 모를 이 억울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교사로 만나든, 학부모로 만나든 교장선생님은 어려운 존재다. 나의 윗선에 있는 관리자일수도, 내 아이를 맡기고 있는 학교의 최고 관리자이기도 하다. 교장선생님의 권력은 크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정도로 일개 교사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그렇게 대놓고 납작 엎드릴 필요도, 굽신거릴 필요도 없다. (물론 인사 한번 더했다고 굽신거린건 아니지만) 교장의 자리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우리 애가 영원히 그 학교에 다닐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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