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철없는 아내다
최근에 갑자기 외국병이 들었다. 외국에 나가고 싶은 병 말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베트남으로 가는 짧은 여행 말고, 진짜 영어권 국가에 오랜 기간 동안 눌러앉아 살고 싶어 안달 난 증상이다.
애를 낳고 육아를 하고 발달문제로 신경 쓰면서 여행과는 담쌓고 산지 오래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내 여행욕구도 많이 사그라든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해외에 나가 살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탓에 자제하느라 힘이 들 정도다.
어학연수 겸 1년간 캐나다나 호주에 살다 오는 건 어떨까? 1년은 너무 짧을까? 애한테 문화경험만 되지 어학실력 향상은 언감생심일까? 기왕 가는 거 캐다나, 호주보다 미국은 어떤가? 물가도 그렇고 미국이 훨씬 돈이 더 많이 들겠지?..
혼자 마음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상상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남편은 일 때문에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는 처지라서, 만에 하나 간다 해도 내가 애 데리고 혼자 가야 하는데 나는 과연 해외에서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 누가 오라고 한 적도 없고 제안한 적도 없고 심지어 아이가 가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있다. 정신이 나간 건가.
이 외국병의 원인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읽은 엄마표 영어 책에서 초등 시절 내내 아이에게 영어 노출을 충분히 시켜줬더니 중학생 시기에 영어권 학교에 가서도 금방 적응할 만큼 실력이 좋아져서 아이 데리고 둘이 호주로 떠났다는 내용이 나왔다.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 책에 나온 아이와 저자인 엄마는 상황이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져서 가게 되었다지만 나는 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처지인데 왜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르겠다. 괜히 애를 볼모 삼아 해외 생활 한 번 해보자는 욕심인 것 같다.
또 다른 원인은 방학 때만 되면 부지런히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들 덕택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명은 아직 솔로라서 뭐 어딜 떠나든 걸릴 게 없으니 더욱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한 명은 부부교사에다가 자녀도 한 명인데 어느 정도 커서 해외여행을 가는데 거리낄 게 없다. 한 달도 짧다고 할 정도로 유럽, 호주, 동남아 가리지 않고 여행을 떠난다. 친구들이 여행 갈 때면 나는 대리만족하게 사진 많이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 호사스럽게 여행을 떠나고 즐기는 SNS 속 사진들을 보면 괜히 질투가 나는데 내 지인들이 올려주는 사진은 얄팍한 질투보다는 나도 같이 행복함을 느낀다. 저 여유를 즐기기 위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고군분투하면서 살아내는지 알기에. 약간은 부럽기도 하지만.
이건 뭐 거의 억지 수준인데 또 원인을 꼽자면 너무 추운 겨울 날씨 탓이다. 지긋지긋한 수족냉증 때문에 겨울만 되면 고통스럽다. 언제부턴가 면역력도 떨어져서 내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는지 조금만 추위를 느껴도 입술이 시퍼렇게 변하고 얼굴도 창백해진다. 변온동물이 돼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겨울이면 그날 기온이 얼마나 내려가는지 꼭 아침마다 확인하고 단단히 그날의 옷 채비를 한다. 느슨해져서 조금이라도 덜 챙겨 입으면 몸에 한기가 들어서 며칠간은 제컨디션을 찾기까지 상당히 힘들다.
아.. 나는 자랑스러운 사계절 보유국인 우리나라 날씨랑은 안 맞는 사람인가 봐..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일 년 내내 고온건조한 날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나 하와이 같은 지역에서 살아야 할 체질임에 틀림없다. 어쩌다가 이런 체질로 춥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동북아국가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겨울이 있더라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기후를 가진 곳으로 떠나고 싶다. 정말 격렬하게 떠나고 싶다..
혼자 이런 망상에 빠져있다가 검색창에 각 지역 날씨를 검색해 보았다. 캘리포니아 LA 날씨, 샌프란시스코 날씨, 밴쿠버 등등.. 밴쿠버는 겨울에 생각보다 눈도 많이 오고 좀 추워 보인다.. 탈락! 샌디에이고가 그렇게 살기 좋다던데.. 겨울 날씨는 어떨까.. 그러다가 문득 플로리다가 떠오른다. 플로리다도 살기 좋은 기후로 유명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플로리다 대표 도시가 어디더라..? 맞다! 마이애미였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날씨를 검색창에 넣어보았다. 오 가장 춥다는 1월에도 최저기온이 10도 정도밖에 안되는군.. 한껏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조용히 남편이 다가온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뒤에서 누가 보고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갑자기 들리는 남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검색창을 껐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날씨..? 네가 거기 날씨는 왜 검색하고 있어..???"
정말 순수하게 너무나 궁금하다는 말투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여행 계획조차 없는, 그야말로 나와 공통분모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한 도시의 날씨를 검색하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시추에이션인지 정말 궁금하다는 목소리.
나는 괜히 한껏 무안해져서 어설프게 미소 지으면서 이런저런 말로 대충 둘러댔다.
"외국 그렇게 나가고 싶니? 나는 어차피 못 가니까 애 좀 더 크면 일 년 연수 다녀와.."
말은 그러라고 하는데 얼굴 표정과 말투는 그렇지 않다는 게 느껴진다.
남편의 친구 중 한 명도 아내와 아이들만 캐나다에 보낸 지 2년째다. 그 집 아이들이 생각보다 영어 실력도 많이 좋아져서 경제적으로 좀 부담되긴 하지만 보낸 거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 있어봤자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만 할 거고 문화 경험도 하고 언어도 배우고 훨씬 낫다고 했다고.
그래서 남편도 아이에게 그런 글로벌 인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없는 것 같지만. 그게 말이 쉽지 가족이 떨어져 산다는 게 보통 일인가.. 게다가 우리 아이는 조금 남다른 아이라 아빠도 없이 저 타역만리에서 엄마랑 둘이 낯선 삶을 산다는 건.. 으 상상만 해도 벌써 머리가 지끈 아프다.
아무래도 혼자 데리고 나가는건 너무 힘들거 같아서 남편을 살살 꼬셔본다. 일 그만두고 우리 세가족 다 같이 해외나가서 살자고. 현지 가서 적응하면서 직업도 천천히 알아보고, 비자 문제도 잘 알아보면 해결할 수 있다는 둥 감언이설을 시작해보려는데 한껏 정색하는 남편이다. 언제 거기 가서 영어를 배우고 이 나이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살으라는 말이냐고, 제발 좀 현실감 없는 소리 좀 하지 말란다.
으이구.. 알았다 알았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야.. 우리 나라 교육의 미래도 밝지 않은데.. 애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런거지 내가 내 욕심 때문에 그런거냐고 몇 마디 더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언젠가 꿈을 쓰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흔한 문구 아닌가! 불가능한 꿈이라도 저버리면 안 된다! 무조건 꿈꾸면서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 그걸 끌어당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나도 한 번 끌어당겨보는 거야!
오 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언젠가는 나도 해외살이 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마음껏 내 형편없는 영어실력을 매일 확인하고 부딪히면서 조금씩 배울 수 있을 그럴 날이 오고야 말 거라고. 오늘도 불가능할것같은 나만의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