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 가해입장이 되어보니 보이는 것들
"누수"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이에 대한 경험은 지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재작년쯤 우리 집이 누수 피해세대가 되어서 윗집으로부터 보수 공사를 지원받았다. 그런데 공사가 생각보다 커서 우리 가족은 무더운 한여름에 일주일 이상 집을 떠나 나가 살아야 했다.
남편이야 아침 해뜨기 전에 출근했다 밤에 들어오니 바깥 살이를 하든 말든 큰 상관이 없었는데 나와 아이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말이 좋아 5성급이지 그다지 호화로운 호텔도 아닌 우리는 그 좁은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원 후에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 봐도 무더운 여름에 실내 공간을 전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호텔에 살면서 빨래도 해결해야 하고 삼시세끼 밥 챙겨 먹이는 것도 스트레스고 여러 가지로 너무 힘들어서 보험 처리해 주는 손해사정사에게 상황을 토로하다가 울기까지 했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좀 반응이 지나치다고 했는데, 집에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하는 나와 아이 입장에서는 호텔도 하루 이틀이지 괴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누수업체 공사를 연결해주고 나서는 사과 연락 한 번 없는 윗 집이 괘씸하기도 하고 답답해서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랫집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화장실 쪽에서 누수가 발생했다고 했다.
세상에나, 우리 집이 누수 가해세대라니.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정중하게 일처리를 부탁하는 아랫집 분에게 최대한 빨리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주말이 끝나자마자 보험회사에 연락을 해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보험회사에서는 사고를 접수하고 나서 나에게 따로 누수 공사를 맡길 업체가 있느냐고 물어봤다. 평소에 내가 아는 공사 업체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고 했더니 그럼 보험회사에 연계되어 있는 업체에 맡겨도 되냐길래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빠른 속도로 공사 업체 사장님이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고 곧바로 우리 집과 아랫집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아랫집에 내가 따로 전화해서 약속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자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면서 중간에서 복잡한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업체 사장님과 아랫집을 연결해서 바로 시간을 잡아보라고 제안하니 그러겠다고 했다.
자세히 언급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공사업체 사장님과 아랫집 사람들이 통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한 것 같았다. 서로가 굉장히 불쾌하다고 했고, 아랫집 분들은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고 사장님은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람들 좀 이상하다며 욕을 했다. 중간에 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아랫집에 찾아가 상황이 좀 꼬인 것 같다며 자세히 설명을 하고 업체를 바꾸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서 내 상황을 설명하니 하는 말이,
"그래서 보험회사에 맡기면 안돼요. 보험회사랑 연결된 업체들이 아파트 정비 건을 맡겨봐도 일도 제대로 하는 경우가 없고 돈만 받아간다니까요.." 했다.
차라리 우리 아파트 누수 공사를 많이 해온 업체가 하나 있는 게 거기에 맡기는 게 어떠냐 싶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그전 업체에는 미안하지만 취소를 하고 관리실에서 추천해 준 업체를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보험회사에서 난리였다. 나에게 연락해서 왜 갑자기 업체를 바꾸게 되었는지 경유를 자세히 물어봤고 나는 나름 타당한 이유를 댔다. 뭐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새로 맡게 된 업체에서 견적서를 한 번 받아보고 결정하겠다며, 절대 공사를 먼저 시작하지 말 것을 나에게 당부했다.
새로 연결된 업체 사장님이 와서 누수 상황을 점검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
"보험회사 놈들 믿으면 안돼요. 다 사기꾼들이라니까. 일도 제대로 모르면서 누수 공사한다고 설치다가.. 엉망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니까요.."
정말 그런가? 보험회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업체도 아니고 그저 연결되어 있는 업체라고 했는데.. 그런데도 일을 엉망으로 한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왜 이 업계 사람들에게는 보험회사가 이토록 부정적인 이미지일까 궁금해졌다.
업체 사장님께 견적서가 왔길래 보험 담당자에게 보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고객님, 새로 맡기신 업체에서 온 견적서 보니까 잔뜩 부풀려 있어요. 이 정도 누수 공사에 이렇게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건 말이 안돼요. 꼭 이 업체에 맡겨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니요, 이유는 없는데요. 이미 업체를 한 번 바꾼 마당에 또 바꾸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또 우리 집 아랫집을 새로운 누군가가 방문해서 또 새로이 견적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꼭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면 가격 조정을 해서 그 업체에 맡겨달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고객님께서 저희 회사에서 보상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는 금액은 지불하셔야 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뭐라고, 이놈아 나한테 지금 협박하는 거냐.
말투는 아주 친절했지만 내용은 반협박이었다. 안 그래도 누수 일 처리하느라 골머리가 아프고 누수 가해세대로서 기본적으로 내야 하는 충당금도 각오하고 있는데 또 돈을 더 내라고?
내가 너네 보험회사에 지난 십 년간 낸 돈이 얼만데? 적지 않은 돈을 매 달 꼬박꼬박 납부했으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지 이 놈들아.
나도 화가 났다. 담당자는 결국 현장 감식단을 파견해서 그 금액이 적당한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연락하겠노라고 했다. 너무 금액이 지나칠 경우 자기들도 방법이 없다는 식이었다.
공사업체 사장님께 연락해서 보험회사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또 하는 말은.
"보험회사 그것들 원래 그렇게 비싸다고 오버해요. 그게 관행이에요. 무조건 깎으려고 보는 거죠.."
그런가? 내가 지금 이것들한테 놀아나고 있는 건가?
다음날 진짜로 현장 확인하러 온 또 다른 보험회사 사람은 확인해 보더니 큰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본사에서는 현장에 나와보지 않았고, 여기 집 규모와 천장 자재를 잘 모르고 일단 비싸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그 담당자와 공사업체 사장님은 이전에 같이 누수건으로 일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럼 일이 좀 더 쉬워지겠군 싶었다. 정말로 담당자는 업체 사장님께 몇십만 원만 좀 깎아달라고 부탁드린 후에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지난 며칠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더니 진작 떨어져야 할 몸살이 더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봤자 보험에서 보상되는 금액 이외에 내가 내야 하는 금액도 상당히 컸기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내가 누수 피해 세대가 되어 공사를 진행할 때는 윗 집이 너무 밉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게 화가 났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윗집 입장에서도 보험회사와 연락하고 이런저런 서류 처리를 하는 게 상당히 귀찮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말이 누수 가해 입장이지, 내가 누수되라고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아파트가 노후되는 바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내 통제밖의 일이다 보니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한다는 게 귀찮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짜증스러웠다.
그 당시 윗 집에서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면, 뭐 공사 보상해 줬으면 됐지 굳이 뭐 구두로 사과를 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니 이렇게 새로운 게 보이고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한 만큼 보이고 느끼나 보다. 한동안 공사업체, 관리실, 보험회사, 손해사정사랑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하며 지내다 보니 그 사이 아랫집 공사는 마무리되었고 보상금도 곧 지급될 예정이다.
남편한테 누수건으로 중간에서 처리할 일도 많고 (사실 전화받는 일이 전부지만) 너무 스트레스라고 토로하느라 바빴다. 게다가 보상금보다 금액이 초과되어서 결국 내가 부담해야 할 금액도 적지 않았다. 내가 누수되라고 물 받아놓고 기도드린 것도 아닌데 이게 웬 생돈 지출에 이 난리인가 싶어 화가 났다.
혹시 맨 처음에 보험회사와 연계된 업체와 했다면 추가 부담금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이 사장님이 괜히 더 비싸게 덤터기 씌우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보험회사도 공사업체도 관리실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이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보는 문화가 팽배한걸 보니 어느 한쪽은 뻥튀기해서 이익을 더 도모하는 게 아닐까 싶고.. 이 쪽 업계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나 같은 순진한 인간은 덮어놓고 당해야 하는가 싶고.
그렇지만 일단 끝이 났으니 다행이고, 더 큰 공사가 아니라서 이 정도에서 끝나서 또 한 번 다행이다 싶다. 공사 규모가 더 컸다면 더 신경 쓸 일도 많고 복잡했을 텐데.
살다 보니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닌데 해결해야 하고 뒷감당을 해야 할 일이 생기고 내 힘으로 그걸 막을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차피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냥 긍정적인 자세로 겸허히 해내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막상 그게 잘 안된다. 그래도 계속해서 연마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내가 원하고 바라지 않아도 어느 때든 생겨날 수 있으니까.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덜 스트레스받으며 편한 마음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여유를 길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