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앞두고 야구에 빠지다

기아 타이거즈 팬입니다

by 레이첼쌤

SSG 랜더스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2022년 야구 시즌의 막이 내렸다.

2022년에 내 인생에서 겪은 큰 변화를 하나 꼽자면 단연 야구라는 스포츠에 꽂히게 된 사건이다. 나는 올봄까지만 해도 야구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야구장을 실제로 가본 것도 인생에서 딱 두 번뿐이었다. 볼, 스트라이크 같은 기본적인 규칙은 물론이고 유격수, 지명타자 같은 개념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올해 여름초에 우연히 야구장에 한 번 가게 되었고, 그 후로 순수하게 야구 경기장에 간 것만 20번이 넘는다. 광주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아 챔피언스필드에 가서 기아 팬으로서 응원을 했다.

6월에 처음 야구장에 간 날, 나는 같이 간 지인에게 전광판에 나와 있는 "박찬호"선수 이름이 제가 아는 옛날 "그 박찬호"냐고 물어봤다가 제대로 무안을 당했다. 그 정도로 나는 무지했다.


기아 구장에는 아이들 놀 수 있는 놀이터 시설과 모래놀이터가 잘 구비되어 있는 편이라 외야석에 아이들 데리고 가서 돗자리 깔아 놓고 보기 좋은 구조였다. 우연인지 주변에 오래전부터 야구광팬이었던 엄마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나도 아이 데리고 껴서 갈 기회가 생겼다. 아이는 친구들과 놀 시간을 주고 나는 야구라는 것을 진지하게 관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구장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한껏 흥이 난 응원단장과 예쁜 치어리더들이 나와 춤을 추고 응원하며 응원가를 부르고, 각 타자들마다 고유의 응원가를 부르면서 응원하는 분위기가 나를 절로 신이 나게 만들었다. 관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나이도, 성별도, 외모도 다 제각각이고 서로에게 타인들이지만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하나의 목표로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춤추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무언가를 향한 그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야구장에 다녀오니 자꾸만 또 가고 싶어 졌고 다음 경기 일정을 계속 검색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이 갈 때 조용히 껴서 갔다고 하면, 점점 나는 대담해져서 내가 먼저 야구장에 가자고 제안해서 지인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우리 가족끼리만 가기도 하고, 심지어 아들과 나 단둘이 관람하러 간 적도 있다. 관객석도 처음에는 외야석에만 있다가 경기 관람하기 좋은 VIP석도 종류별로 예매해서 가보았다. 8살 난 아들도 1회부터 9회까지 집중해서 경기를 보는걸 힘들어하고 금방 흥미를 잃곤 했지만, 자주 다니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데리고 다닐만했다.



집에서도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하며 테스 형 홈런!" 중독성 있는 노래를 같이 부르고 나중에는 모든 선수의 응원가를 빠짐없이 외워서 같이 불러대는 게 일상이 될 지경이었다. 야구장에 다니다 보니 유니폼과 모자도 필요할 것 같아 아이 것도 사고 내친김에 내 것도 구매했다.

신기한 게 사람이 좋아하고 흥미가 있으면 금방 학습하게 된다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야구 룰들도 점차 이해 가기 시작했고 헷갈리는 것들은 따로 찾아보기도 했다. 야구 선수들 전력에 대해서도 검색해보고 심지어 치어리더 SNS까지 찾아가 보기도 했다.



우리 선수가 홈런도 아니고 1점짜리 안타를 쳤는데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더니, 옆에 있는 지인들이 "평소에 스트레스 많나 보네." 하며 다들 웃었다.

내가 정말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걸 야구장에서 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는 뇌의 도파민을 자극해서 중독에 빠지기 쉽다고 하는데 점점 내가 그렇게 돼가고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80년대 독재 정권이 국민의 눈과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여 우민화시키고자 3S 산업(SEX, SPORTS, SCREEN)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들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것에 빠지는 우매한 시민이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는데, 올해 내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뛰어난 운동선수들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부를 쌓는 것도 조금 이해가 갔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학생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도록 학습적, 인성적인 면에서 교육시키는데 힘쓰는 교육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도파민을 자극하고, 열정과 순간적 쾌락을 제공하는 스포츠 선수들이 아이들을 훈육하고 가르치는 교사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번다. 인간은 원래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라 그런가.


20대 시절에는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며 새벽까지 놀기도 하고, 연애하면서 남자 친구도 만나다 보니 일상에서 설레고 흥분돼서 즐거움을 느낄만한 일들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제 30대 막바지가 되고 남편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휴직까지 하고 전업주부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내 일상은 온통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들로 꽉 차 버린 것 같다.


지루하면 다행이지, 아이의 발달상 어려움으로 인해 자식 걱정하느라 우울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사느라 바빴다. 설레는 일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사치가 돼버렸다. 일 년에 한두 번 서울에서 만나는 대학 동기 모임에도 아이를 딱히 맡길 데도 없고 스스로 불안해서 마음 편히 갈 수 없었다. 마음 편한 친구들 만나 실컷 수다라도 떨고 오면 한동안은 살 만하다는 기분이 드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안주에 집에서 마시는 캔맥주 정도가 한동안 일상의 낙이었다. 그랬던 내가 야구장에 가니 그 분위기만으로 흥분이 되고 설레게 되니, 자꾸 그 기분을 느끼고 싶게 된 거다. 특히나 야구장에서 마시는 맥주는 집에서 마시는 그것보다 천만 배는 더 맛있었고, 맛있는 안주가 없어도 술술 들어갔다. 다행히 아이도 야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남편도 워낙 야구를 잘 아는 사람이라 경기장에 같이 다닐만했다.


야구장이야 워낙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라있고,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신이 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치지만 집에서 티브이로 야구 경기를 보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집에서까지 생중계를 챙겨봤다. 1회부터 9회 말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전혀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기아 타이거즈가 연패하고 가을 야구를 볼 기회가 사라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결국 기아는 떨어졌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다른 팀들의 한국시리즈 경기도 웬만하면 챙겨보았다.


광주 챔피언스필드가 지겨워질 때쯤 즉흥적으로 대구 삼성 라이언즈 파크까지 가서 원정 응원을 했다. 그리고 내년에는 잠실구장, 사직구장도 모두 직접 가서 응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년이면 나는 불혹인데 뒤늦게 이렇게 야구에 빠져도 되는 건가.


인생 참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살다 보니 내가 야구라는 스포츠에 이렇게 진심이 되는 날도 오다니.

한 가지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복잡한 야구 규칙도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었던 건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관심이 가면 학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우선 배우려는 대상에 대한 호감과 애정이 뒷받침되어야 배움이 일어난다는 것. 교육자로서도 느껴지는 바가 크다.


얼른 내년 4월이 되어서 열심히 야구 응원하러 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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