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작 달리기 하라고 말 안 해줬어요?

4일 차 달리기하고 러너스 하이를 느낀 사람

by 레이첼쌤

나만의 모닝 루틴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어간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전투적으로 해내는 그런 미라클 모닝까지는 아니고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다이어리를 쓰고, 책을 몇 장 읽기부터 시작했다. 워낙 약골 체력이라 그런지 아침잠을 조금 줄이니 오후에는 피곤이 몰려와서 근무하다가 짬짬이 졸기도 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영 적응이 되지 않았고 체력이 좋아진다는 느낌도 딱히 없었지만 아침에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워킹맘의 일상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틈이 전혀 없었다.


휴직을 하고 전업주부의 삶을 시작한 후에도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지만,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뭔가를 했다.

몇 달 전에는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읽고 걷기의 매력에 빠져서 일어나자마자 새벽 공기 마시며 한 시간씩 걸었다. 이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도 의무감에 억지로 일어나는 기분이었다면, 새벽 걷기를 하면서부터는 약간의 설렘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만큼 걷기 시간 자체가 힐링이었고, 어두스름한 새벽에 나가서 날이 점차 밝아지며 아침이 오는 광경을 바라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집 앞에 걷기 좋은 쭉 뻗은 천변길이 있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에서 걷기란 날씨라는 걸림돌 때문에 매일 실천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한여름에는 아침 6시 이전에 나가도 햇빛이 따갑고 무더워서 모자를 써도 눈이 부셨다. 그리고 가을이 끝자락의 겨울이 시작되는 요즘 같은 날씨에 아침은 가볍게 옷을 입고 걷기에는 너무 춥고, 패딩을 입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너무 귀찮았다. 한여름과 한겨울에 야외에서 운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에게 힐링을 주던 새벽 공기와 청명한 하늘 감상을 포기하고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하기로 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러닝머신은 TV를 보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은데 걷고 나면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다. 내가 TV를 본 건지, 운동을 한 건지 헷갈리고 멍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TV를 아예 끄고 걷자니 그 걷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며칠 전 우연히 영국 런던의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고액 연봉 변호사의 브이로그를 우연히 보았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생에서 실패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란, 전형적인 백인 영국 귀족 남자 느낌이었다. 아시아의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것도 지방에 살며, 현재 전업주부에 하는 일이라고는 집안 살림과 남편, 자식 돌보기가 전부인 나의 삶과는 공통점이 1도 없어 보였다. 너무나 완벽하고 이질감이 드는 사람의 인생은 브이로그로라도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래도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서 치열하게 사는 젊은 영국 남자의 삶이 어쩐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브리티쉬 악센트도 듣고 싶은 마음에 설거지를 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서 운동할 시간도 내기 힘들 텐데,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를 가졌던데 어떻게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고 자기 관리를 할까 궁금했다. 이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가서 20분간 러닝을 했다. 따로 운동장이나 달리기 전용 트랙이 아닌, 영화에서나 볼법한 런던이라는 멋진 도시의 인도 위를 열심히 뛰었고 러닝을 끝낼 때쯤에는 땀에 흠뻑 젖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20분만 뛰었는데도 이렇게 땀이 많이 나고 운동 효과가 있단 말인가? 어쩐지 나도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달리기라는 운동이 좋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달리기 마니아고, 감명 깊게 읽었던 <마녀 체력>의 저자도 처음에 무작정 시작한 운동이 달리기라고 했다. 즐겨보는 부동산 관련 블로거도 매일 30분씩 러닝 챌린지를 하며 구독자들에게 동기부여를 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인생을 당장 바꾸고 싶다면 달리기부터 시작하라는 게 인생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며 사는 사람들이 주로 말하는 메시지였다.


그래도 달리기는 감히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걷기로만 만족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나만의 한계선을 지어서 선을 그었다. 나는 원체 체력이 좋지 않아 워낙 몸이 약하고, 어설프게 운동을 시작했다가 편도염이 오고 더 아팠던 기억이 있다. 해봐야 요가나 간단한 스트레칭, 동네 뒷산 등반 아니면 최근에 시작한 걷기 정도가 나에게 딱 알맞은 거라고 당연시 여겼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내 체력의 한계를 결론짓고 그 이상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영국 남자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본 다음날은 처음으로 러닝머신에서 6 이상의 속도로 천천히 뛰어 보았다. 뛰어보고 너무 힘들면 중간에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시작했다.

처음 5분 정도는 힘들었다. 내 온몸 구석구석에서, 뼈와 장기들 하나하나가, 왜 갑자기 뛰느냐고 평생 안 하던 달리기를 불혹을 앞둔 나이에 시작하면 어떡하냐고 나에게 항의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은 내가 뛰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할 만했다. 그냥 그 유튜버처럼 20분만 뛰어보자고, 그 정도 의지는 나에게도 있지 않겠냐고 거부하며 항의하는 내 몸에 대답하며 뛰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30분 뛰기를 끝냈다.


평소에는 걷기를 한 시간을 해도 전혀 숨이 차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지도 않는데 역시 달리고 나니 숨이 차오르고 다리에 힘이 탁 풀린다. 아침에는 입맛도 없는 편인데 오전 내내 배가 고파서 평소보다 많이,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원래 주말에는 모닝 루틴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 평일에 나를 그토록 옥죄었으니 주말만이라도 편히 쉬자는 게 내 신조였다. 혹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면 간단히 스트레칭만 하는 것도 대단한 거라고 여기며 주말 아침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제 느꼈던 그 달리기의 느낌을 또 느껴보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라서 일요일 아침 눈 뜨자마자 바로 피트니스로 향했다. 멋모르고 뛰었던 첫날보다 둘째 날은 확실히 더 힘들었다. 운동하고 나서도 하루 종일 피곤해서 겔겔댔고, 온몸의 근육이 땅기고 관절이 아파왔다. 안 하던 달리기를 하니 내 몸이 힘들다고 시위하는구나 싶었다.


셋째 날에도 러닝 머신 위에서 30분 뛰기를 했다. 이제 TV를 굳이 틀지 않아도 심심하지가 않다. 왜냐면 뛴다는 것 그 자체가 힘이 들고 온 몸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라 TV 시청에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다.

뛴다는 그 사실 하나만 인지하면서 뛰느라 정신이 없다. 그 기분이 좋았다. 내가 최근에 살면서 한 가지 일에 이토록 집중한 적이 있었나 자문했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중간중간에 스마트폰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주의력이 쉽게 흐트러지는 게 일상이었다. 걷기를 할 때는 예능이나 뉴스에 집중하느라 이게 운동을 한 건지 티브이를 본 건지 헷갈려서 성취감이나 보람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달리기를 하니, 그냥 뛴다는 것 그 하나만 하게 된다.


그리고 뛰는 내내 긍정적인 생각만 머릿속에 차오른다.

나는 열심히 뛰고 있다. 나는 내 온몸의 근육과 에너지를 백 프로 써가면서 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고,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이 마치 현실인 양 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 남편, 자식으로 인해 힘들고 스트레스받았던 일도 머나먼 일처럼 느껴지고, 내 마음속에 있던 불안, 우울, 분노의 나쁜 감정들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왜냐면 나는 지금 뛰고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원래 목표로 삼았던 30분에 10분 더 추가해서 뛰었다. 30분이 넘어가니 이상하게 다리가 더 가벼워지면서 숨도 별로 차지 않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게 바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격렬한 운동 후에 맛보는 도취감, 황홀감)인가? 겨우 3일간 30분 뛰기 밖에 안 했는데 벌써 러너스 하이를 느낀다고? 이상하게 뛸수록 더 힘들어야 하는데 마지막 10분은 온몸이 가볍고 더 뛰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무한한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몸이라는 게 이렇게 진실되게 반응하는 매케니즘인지 몰랐다. 서너 번, 비슷한 시간에 했던 달리기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기분이다. 운동을 끝내고 가쁜 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피트니스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다시 집에 오면 내 현실을 다시 마주한다. 챙겨줘야 할 내 남편과 아이. 비록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평소에 느꼈던 그 무게감에서 0.1그람 정도는 더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조금만 더 힘내면 되는 거야.라는 긍정의 기운이 슬며시 올라온다.


왜 진작 아무도 나에게 당장 달리기를 시작하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야?

이렇게 좋은걸 당신네들만 하고 살았던 거야?

참 억울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라도 시작하게 되어서.

늦지 않았다. 매일 30분씩 달리면서 나는 더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몸이 건강해야 내 아이를 챙길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이건 진리다.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이전보다 한 움큼 정도는 덜 스트레스받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발달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여, 지금 당장 달리기를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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