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러브 아일랜드를 보고
올해 본격적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 자리 잡은 내 루틴 중 하나는 혼자 식탁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며 점심을 먹는 일이다. 출근할 때에는 이것도 나의 로망 중 하나였다. 급식실에서 시간에 쫓기듯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학생들과 뒤엉켜 먹는 점심시간에 여유란 찾기 힘들었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며 킬링타임용 미드나 보면서 점심을 먹는 호사를 언젠가 누려보고 싶었다. 그 소박한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위한 점심이니 뭔가 제대로 차려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요리 시간도 좀 들이고 나름 브런치 느낌 나게 한 상 차려서 먹기도 했다. 그것마저 귀찮아져서 요새는 그냥 집에 있는 반찬에 대충 먹는다. 그래도 넷플릭스에서 뭘 보면서 볼지 고르는 데에는 공을 들이는 편이다. <애나 만들기>와 <셀링 선셋>을 정말 재밌게 봤고 그 이후에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훑어보는 수준이었다. 셀링 선셋을 보면서 리얼리티쇼 특유의 매력을 맛보니 왠지 드라마는 보기 싫었다. 이래서 리얼리티쇼가 계속 만들어지나 싶을 정도로 타인의 삶을 관망하는 재미는 꽤나 내 욕구를 자극했다.
그러다 언뜻 눈에 들어온 것은 <LOVE ISLAND>라는 연애 리얼리티 쇼였다. 이국적인 바다 배경에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의 모습에 홀려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시청을 시작했다. 미국판 하트 시그널 정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첫 장면부터 하트 시그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미국 각지에서 예쁘고 잘난 남, 녀 싱글들이 소개되고 서로 첫 만남을 가지는데 모두 수영복 차림이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몸매를 여과 없이 다 드러내는 비키니를 입고 시작한다고?
나는 전공이 영어 쪽이기도 했고 평소에도 미드,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보며 어렸을 때 외국물 좀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첫 만남의 설정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출연하는 남자들도 트렁크 수영복 하나만 간단하게 걸치고 하나같이 운동으로 단련된 몸매와 식스팩을 자랑하며 등장했다.
어디서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모아놨나 싶을 정도로 눈호강은 제대로 할 수 있다. 이미 유명한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이라서 더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훈남, 훈녀 일반인들을 피지의 멋진 빌라에 모여두고 서로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나서고 커플이 되기도 했다가 깨지기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쇼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서로의 마음에 들어서 커플이 되면 첫날부터 한 침대에서 자게 된다. 커다란 침실에는 침대가 여러 개 배치되어 있어서 멤버들 모두 한 방에서 자고, 커플이 성사되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 침대를 사용한다. 카메라가 밤에 자는 모습까지 촬영 중이기도 하고, 사전에 약속된 규칙이 있는지 몰라도 출연자들은 어느 정도 선을 지키기는 한다. 서로 안아주거나 키스를 하는 정도다.
제작진이 출연자들에게 핸드폰 문자로 미션을 꾸준히 보내는데 그중 하나는 어느 정도 안정된 커플이 되면 "hideaway"라는 따로 꾸며진 방에 보낼 권리가 주어지고 그 커플은 그 방에서 자기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독립된 방에서 서로 눈 맞은 청춘남녀가 함께 하룻밤 잠을 자니, 나머지는 상상하는 바 그대로다. 물론 장면의 수위는 아주 건전한 정도로만 방영된다.
그리고 처음 멤버가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 멋지고 잘난 새로운 뉴페이스들이 대거 투입된다. 자연스럽게 기존의 커플 구도에 변화를 주고 갈등을 빚는다. 그리고 커플이 되지 못한 멤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빌라를 떠나야만 한다. 이게 웬 황당무계한 설정인가 싶은데, 자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커플로 선택하지 않아 놓고 전에 커플이었던 사람이 탈락하고 떠나게 되면 출연자들은 거의 통곡하면서 운다. 울고 힘들어하다가도 이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주어지는 미션 게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풀에서 수영하고 운동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게 웬 천국인가 싶었다.
지금 내 현실과는 너무 괴리감이 들어서인지 나는 점점 더 빠져들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젊은 청춘남녀가 피지의 멋진 빌라에 모여서 서로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밀당 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니.
현재 나는 싱글도 아니고 연애라는 걸 혹시 다시 시작했다가는 법적 공방에 휘말릴지도 모를 유부녀 신분에다가 미국에 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난 이 쇼를 끊지 못하고 보고 있는 걸까.
함께 산지 10년이 돼가는 남편은 자꾸만 나를 실망시켜서 다퉜다가 화해했다가를 반복 중이고, 아들은 ADHD 증상으로 매일매일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늘 나를 불안하게 한다. 이게 나에게 주어진 일상이고 현실인데 <러브 아일랜드>만 틀기 시작하면 눈앞에 파라다이스가 펼쳐진다.
일단 선남선녀들이 골고루 나오니 눈호강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이긴 하다.
인생의 가장 큰 고민과 역경이라고는 오로지 저 많은 매력적인 이성중에 누가 나를 맘에 들어할지, 내가 가장 끌리는 사람은 누구인지만 생각하면 되는 출연자들의 처지가 미치도록 부럽다. 물론 그들도 그 연애 문제 때문에 슬퍼하거나 낙담하기도 하고 좌절까지도 한다. 그것도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고민이 저런 수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
얼마나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건지 인식하기는 할까.
커플 상대와 대화하면서 결혼을 몇 살에 할 건지, 아이는 몇이나 가지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결혼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나와 남편을 반씩 닮은 예쁜 아이를 낳아 멋지게 키우며 행복하게 사는 상상만 했던 시절 말이다.
청춘에 있을 때는 그게 청춘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문화권이 아닌 미국이라는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20대 청춘들이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를 마음껏 과시하고 소비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부럽고,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 더 자꾸만 보고 싶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