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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Feb 22. 2024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그 충격과 공포

직접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는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평판이 괜찮다는 영어학원에 상담받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아직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낼 마음이 없다. 그래서 별 해줄 말이 없어서, 그 학원차 동네에서 자주 본 것 같다고 상담 잘 받아보시라고만 말했다. 그 엄마의 카톡 대화에서 혹시 괜찮으면 애들을 같이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뉘앙스를 캐치했다.


나야 천 번, 만 번이고 영어학원에 보내고 싶고, 보낼 수 있는 컨디션이라면 진작에 보냈겠지만 아직 아이는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이의 주의력과 집중력은 저학년을 대상으로도 최소 1시간 반에서 2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영어학원수업을 견뎌낼 만큼 단단하지 않다. 억지로 보내면 다니기야 하겠지만, 청각적 집중력도 약하기에 그야말로 앉아 있다가 머릿수 채워주는 역할만 할게 뻔하다.


학습이라고는 지금 하고 있는 주 1회 방문학습지 선생님과의 일대일 수업과 그로 인해 매일 해야 하는 일정 분량의 숙제 그게 전부고,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겨우 겨우 해내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 더 추가할 욕심도 의욕도 나는 없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것만 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당장 3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니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아주 조악한 엄마표 영어로 영어동화사이트 매일 조금씩 보여주기와 ORT 1권씩 따라 읽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것도 솔직히 보통 아이들, 영어 좀 시킨다는 엄마들이 보면 콧방귀를 뀌고도 남을 정도로 부끄러운 학습량이다. 언어발달지연 진단으로 인해 우리말 습득도 충분히 늦었으니 외국어인 영어 학습은 기대를 내려놓은 지 오래다.




영어학원에서 상담을 빙자한 레벨테스트를 받고 온 지인은 아주 큰 충격에 휩싸인 듯했다. 단톡방에 불이 났다. 학원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영어사교육 업계에서 유명한 학습지를 몇 년째 시켰고, 거기서 파닉스도 뗐고, 따로 영어 파닉스며 동화 영상들도 꾸준히 노출시켜주었는데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고 했다.


레벨테스트 후에 원장님은 파닉스 기초가 아예 되어있지 않다며 저학년 동생들과 함께 파닉스 기초반에 배치되어야 할 수준이며 모음 i, e 등의 발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알파벳 소문자와 대문자 중에 아직도 헷갈려하는 게 몇 개 있다는 둥 엄마가 파악하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까지 쥐 잡듯이 알아내서 현 수준을 제대로 판단해 주었다고 했다. 원장님과 레벨테스트 중인 그 아이의 사진까지 보았는데, 아이의 뒷모습은 잔뜩 긴장하고 움츠러들어 보였다.


현타를 제대로 맞은 듯한 지인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 영어학원에 당장 등록하자면 지금 하고 있는 각종 예체능을 거의 포기하고 영어학원에만 초점을 맞춰서 스케줄을 다 바꿔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파닉스 기초를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 충격적이고, 어느 정도 떠듬떠듬 영어 문장은 읽는 줄 알았는데 그 수준이 엉망이라고 하니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그 집 아이 생각부터 났다. 엄마도 이렇게 충격인데, 그렇다면 레벨테스트를 받는 동안 아이는 얼마나 떨렸을까. 안 그래도 좀 소심하고 낯가림이 있는 아이인데 처음 보는 원장선생님이라는 사람 앞에서 한글도 아닌 영어를 읽고, 시험을 보고 하는 과정에서 평소보다 실력 발휘가 덜 되는 건 당연지사 아니었을까.



더더욱 앞으로 그런 레벨테스트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똑같이 그 엄마처럼 처참히 무너질 것 같아서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리고 아이 또한 제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할게 분명하다. (사실 영어 실력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인풋만 조금씩 쌓아가는 중이지만) 무엇보다 전공이 무색할 만큼 자기 자식 영어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있는 엄마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것 같아서 두렵다. 이미 발달지연을 겪으면서 엄마로서의 자존감은 바닥을 친지 오래지만, 아직은 그런 나에게도 더 무너질 자존심이 조금은 남아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다시 생각해 보면 분명 그 학원에서 조금 과장한 측면이 없잖아 있을 수 있다.

다른 엄마도 다른 영어학원에 아이를 데리고 레테를 받으러 간 적이 있는데, 원장선생님에게 "왜 여태 아이를 이 수준이 되도록 방치했느냐"며 온갖 훈계를 받고 왔다고 했다. 사실 그 집 아이는 영어는 몰라도 수학, 과학에 뛰어나서 영재원에 합격할 수준이고 영어 사교육을 등한시하지도 않았다. 아이의 성향상 특정 과목에 더 치중했을 가능성이 높고 영어 학원과 과외를 받긴 했지만 크게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초등 고학년 아이에게 레벨테스트는 중학교 문법, 어휘 시험지로 해놓고 실력이 형편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하니 뭐 할 말이 없었다. 그 학원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대치동에 사는 것도, 유명 학군지에 사는 것도 아니니 7세고시니, 황소 레테니, 유명 어학원과 같은 진짜 학군지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레테 경험이 없다. 모든 생각과 판단은 내 경험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학습 능력이 갖춰진 아이에게 윗단계 학년의 시험지를 쥐어주고 못하는 아이라고 낙인찍는 학원의 행태는 좀 어이가 없었다. 나라면 절대 그런 레벨테스트는 데리고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엄마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그 후로 유명 어학원 출신 강사를 어렵사리 구해 과외를 시작했다고 했다. 과외비용은 어마어마했다.


저학년 동생들과 파닉스 기초반에 다녀야 한다는 엄마는 과외를 붙여서라도 파닉스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마스터시키고 제 실력으로 된 반에 들여보내고 싶다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아까운 과외비여.. 이렇게 학부모들이 영어에 돈을 쏟아붓게 되는 거구나. 이미 다른 학원비와 교육비로 굉장한 돈을 쓰고 있는 집으로 알고 있는데 파닉스 과외까지 추가하다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닐까. 영어가 그만큼 중요한가.


나는 아이가 영어 문장을 제대로 읽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다. 파닉스를 배우면, 알고 있으면, 그야말로 마스터한다면 좋겠지만 마스터하지 않아도 꾸준히, 매일, 계속해서 문장을 듣고 읽고 따라 하면 언젠가 체득하게 된다. 어차피 파닉스를 알아도 그 규칙의 예외로 적용되는 단어들도 차고 넘친다. 계속 많은 단어와 문장을 읽고 따라 하다 보면 결국 그 규칙을 파악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천천히 시킬 생각이었는데, 이런 내 학습 논리는 너무 순진한 방식인가?



나에게 일말의 조언을 구하는 듯한 그 엄마에게 일단 너무 고민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했다. 학원은 원래 학부모를 대상으로 불안마케팅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애가 긴장했을 수도 있고 지금까지 영어 학습한 거 다 쌓아놓고 있을 것인데 실력 발휘가 안된 것뿐이라고. 아웃풋은 언제라도 늦게 터질 수 있는 거라고, 조금 더 기다려주면 된다고 말이다.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영어노출이 제로인 것도 아니고 꾸준히 조금씩 학습지로 해왔다면 그게 어디로 사라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더 학습해 가면서 머릿속에 있는 걸 자극시켜 주고 꺼내주면 될 일이다.






당장 다다음주에 개학이다 보니 예비 초3 맘 단톡방에는 영어 이야기로 뜨겁다. 나는 그 뜨거운 토론 분위기에서 당최 할 말이 없어서 관망하고 있다가 투명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 간간이 한 마디씩 던지는 수준이다.


학교마다 교과서 출판사는 어디 것인지, 수업은 원어민 선생님만 하는지 한국인 선생님도 들어오는지, 수업 진행방식은 영어로 하는지 우리말로 설명도 해주는지, 숙제는 어떤 게 나오는지 다들 궁금한 게 너무 많다.

그것도 유치원 때부터 체계적으로 단계 밟아가며 대형 어학원을 보내고 있는 엄마들이 가장 열정적이다. 내 생각에 그 정도로 장기간 시키면서 아이가 따박따박 따라가고 있다면, 세상 뭐 걱정할 게 있겠냐 싶은데도 걱정이 되나 보다.


지방 비학군지 엄마들이 이 정도라면 유명 학군지 부모들은 어느 정도 수준일지, 또 그 아이들은 얼마나 잘할지 상상도 안된다. 느린 아이 덕분에 영어라는 큰 산에 강제로 초연하게 되어 남의 집 불구경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나라고 해서 애가 잘 따라와 줬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건 언어 이해 능력이고, 독해력이고, 추론 능력이라서 오늘도 나는 영어보다는 아이에게 우리말 책을 권한다. 제발 한 권이라도 진득하게 앉아서 읽어주면 좋겠지만 유아기에 책을 좋아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각종 스마트기기의 맛을 알아버린 녀석은 도통 책이 재미가 없나 보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읽힌다. 어차피 영어 아웃풋 욕심도 없기에 우리말 언어 실력이 올라가면 영어야 언제든지 암기력과 꾸준함으로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딩과 리스닝 한정해서)


가끔 매일 봐야 하는 영어 영상마저 보기 싫다며 징징대는 아이에게 "너 이러면 다른 친구들처럼 하루에 두 시간씩 공부해야 하는 학원 가야 한다"라고 협박은 한다. 정말 그것마저 안 하면 공교육 수준조차 못 따라가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되려 아이에게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덕분에 영어에 초연해져서,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쫓아다니며 그 결과에 일희일비할 일도 없고, 그걸로 자존감 상할 일은 더욱 없어졌기에 감사하다. 언젠가 학원을 보내고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오겠지만, 그래서 한 번 정도는 아이의 영어 수준 점검 차원에서 레벨테스트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전까지는 레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서 기쁘기까지 하다.


내 자녀만큼은 영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모국어처럼 구사하며,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로 삼으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여기저기서 진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아직 그런 목표를 포기한것은 아니다. 발달장애로인해 모국어 습득조차 어려웠고, 제대로된 상호작용이 되기까지 몇 년이 더 걸렸으며, 평생 아이가 사람들과 제대로된 사회적 관계조차 맺지 못하고 고립된 인생을 살게 될까봐 밤잠 못드는 날이 많았다. 모국어라도 제대로 알아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며 장난치고, 웃고, 화내고, 싸우고, 화해하며 살게 되기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것을 꼭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영어에 대한 걱정은 덜 되는것 뿐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기본적인 역할은 해주고, 혹시 본인이 원해서 훗날 외국 유학이라도 가고 싶다거나 교환학생이라도 가게 된다면 그 때가서 스피킹이든 라이팅이든 열심히 하면 되겠지. 영어에서만큼은 조금은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다. 그러기엔 주변 엄마들은 다들 너무나 뜨겁고 열정적이라서 때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 같지만.




<이미지 출처: JTBC 다수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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