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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12. 2024

의사엄마들은 원래 사과를 잘하나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입니다만

같은 반에서 내 아이를 좋아해 주는 친구가 생겼다. 학기 초에 아이에게 먼저 다가와 "우리 친구 할래?"라고 말하면서 둘은 친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 친구가 먼저 친구 할래?라고 물어본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몇 번이고 그 이야기를 했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꽤 많았다.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황당 과학 상식 같은 책을 좋아해서 둘은 아무 맥락 없이 수수께끼만 주고받으면서 대화만 나누고 놀아도 즐거워했다. 그 친구는 내 아이처럼 특별한 발달 문제는 없는 것 같았지만, 원래 타고나기를 책과 배움을 굉장히 즐기는 아이였다. 수과학 분야는 당연하고, 역사에도 관심사가 남달라서 한국사건 세계사건 역사 지식이 상당했다. 당시 나는 겨우 초2가 이런 것도 알다니, 하는 충격을 받을 정도로 어쩌면 나보다 더 아는 게 많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나마 비슷한 성향의 아이와 같은 반이 되어서 친해지기까지 했으니 나는 감개무량했다. 언제나 그 친구는 아이에게 해맑게 다가와 인사하고 손 잡고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몇 번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잠깐씩 놀기도 했다. 그 친구도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살짝 있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갑작스럽게 그 친구와 놀고 싶지 않다고 울면서 말했다. 맨날 자기를 때리고 폭력을 쓴다고 싫다고 말했다. 믿기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젠틀한 모습이었어서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아이가 인지 왜곡으로 인해 피해의식도 상당했고, 그로 인해 좀만 아파도 엄살을 심하게 부리는 증상이 있었기에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살짝 건드린 건데 애가 또 과민 반응 한 거겠지..'

'아이가 저렇게 울 정도로 심한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면 담임선생님께 혼나도 진작 혼나지 않았을까.'


아이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의문을 품고 지냈다. 그 친구 엄마 연락처를 알고 있었기에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학교에서 따로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의 이야기만 듣고 그걸 바탕으로 피해자라 여기며 전화해서 뭐라고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저학년이라 친구랑 친하게 지내다 보며 으레 겪는 성장통이겠지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객관적인 상황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기는 했다. 아무렴 애가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해서.


담임선생님과 정기 상담 중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더니, 안 그래도 그 친구가 놀 때 조금 과격하게 밀치고 몸으로 부딪히는 행동이 보여서 몇 번 지도한 적이 있다고 눈여겨서 보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비록 그 친구 입장에서는 친밀함의 표시인 것 같지만 조금 속상하기는 했다. 그리고 애가 없는 말을 지어내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상담이 있은 얼마 후에 어느 날 그 친구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사뭇 긴장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 엄마가 사과하기 위해 전화한 거였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아이가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는지 몰랐어요. 집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설마 학교에서 친구들이 괴롭힌다고 느낄 정도로 심하게 한다고 생각 못했어요. 죄송해서 어떡하죠.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 엄마는 사과를 하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울기까지 했다. 나까지 괜히 민망할 지경이었다.


둘이 싸운 것도 아니고, 학교폭력이라 할 만큼 심한 신체적 접촉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죄송하다고 연신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나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엄마의 직업은 의사였다. 솔직히 말하면 학기 초에 그 친구랑 친해졌다고 했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같은 아파트 단지였고 부모님도 안면이 있는 터라 걱정할 게 없었다. 나의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마음일지도 모른다.


엄마 본인이 전문직이면 콧대 높고 잘난 척하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편견과 다르게 그 엄마는 만날 때마다 허리 숙여 인사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썼고 우리 아이도 잘 챙겨주고 이뻐해 주었다. 속으로 역시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에게 다시는 학교에서 친구 몸에 함부로 터치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혼내겠다는 다짐을 받았고 아이도 친구 엄마의 정중한 사과에 마음이 좀 풀린 듯했다. 그 후로 아이에게 물어보면 요새는 친구가 몸을 밀치는 습관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서먹서먹한 시기를 지나 학기말에는 다시 친해졌다.






이 일을 겪고 한참 지났을까. 최근에 사촌언니가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한 것 같다고 사정을 털어놨다.

초등 고학년인데, 몇 개월동안 지속적으로 조카의 친구가 발뒤꿈치를 장난으로 걷어차고 도망가는 식으로 장난을 했다고 한다. 조카는 전교 임원이기도 하고 심한 폭력은 아니라 매번 그냥 넘어갔고 엄마에게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된 건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친구가 장난이 좀 과한데, 가끔은 폭력이라 싶을 정도일 때가 있다고 학교에서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제야 조카는 그간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못 견디겠다고 털어놨다고 했다.


담임선생님께 연락해서 물어보니, 이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듯했고 부모님이 원하시면 학교폭력위원회로 문제를 넘길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했단다.


가해자 친구의 엄마 직업도 의사였다. 언니는 학교폭력으로 넘길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고민했다. 그 친구가 정식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그냥 좋게 넘어가도 될 문제 싶기도 했다.


한창 고민하는데 가해자 친구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는 피해자 입장이지만 그 엄마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모르니 상당히 긴장된 상태에서 일단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왠걸, 전화를 받자마자 읍소가 펼쳐졌다고 한다. 죄송하다고,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그 녀석이 장난이 심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을 몰랐다, 스트레스받았을 피해 아이 생각하면 너무 죄송해서 할 말이 없다며 한참을 울면서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고 한다.


왠지 더 무안해지고 민망해진 언니는 그냥 이번 일은 처음이니까 크게 문제 삼지 말고 담임선생님 선에서 지도하에 사과받고 반성문 쓰는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내가 경험했던 일과 너무나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아니, 의사 엄마들은 원래 이렇게 사과를 잘하는 거야?"


공부 잘했던 사람은 뭔가 다른가? 하는 원색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워킹맘인 엄마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아빠가 아니라 엄마 본인이 전문직에 의사인 사람들은 손에 꼽는다.(우리 동네는 그렇다)



 자식이 아무리 가해자라고 해도 자존심 덮어놓고 무조건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는 부모님은 흔치 않다.


혹시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만한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닌지, 있었던 사실보다 부풀려진 건 아닌지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이 많고 최대한 아이의 잘못을 축소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상당히 흔하다.


아마 단순히 그들이 겸손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찌 됐건 나에게도 사촌언니에게도 그 전략이 잘 먹혔으니,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은 든다.


혹시 내 아이도 어디 가서 실수로 남을 괴롭히거나 친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앞뒤 따지지 말고 시시비비 가리지 말고, 두말 않고 사과부터 하는게 나와 아이의 신상에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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