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Mar 29. 2024

집에 오기 싫은 열네 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

친한 지인의 아이가 사립대안중학교에 합격해서 입학했다. 학업, 인성 검증에 더불어 체력 검사까지 하는 등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1,2차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언니네 집은 경사가 났다. 공부는 기본으로 잘하던 애가 초등학교 때에도 전교 회장,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더니 결국 중학교 입시까지 무난하게 해낸 것이다.


그 중학교는 기숙사 시스템이라서 무조건 주중에는 학교에서 지내야만 한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흔치 않다지만 아무래도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 아이가 기숙사에 적응해야 한다는 게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합격의 영광으로 잔칫집 분위기였던 것도 잠시, 곧 학교 입학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입학 전에는 기숙사에서 사용할 이불에서부터 사소한 생활용품까지 모두 준비하는 것도 바빴지만 무엇보다 언니는 선행 공부를 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면 주중에 사교육을 돌리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방학 때 최대한 선행을 뺄 만큼 빼두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아이는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한 시간의 쉴 틈도 없이 하루종일 이 학원, 저 학원을 오갔다. 원래는 아이 컨디션 봐가면서 적당히만 시키는 수준이었는데, 내로라하는 인재들만 모인 중학교에서 혹시나 뒤처질까 봐 두려웠는지 합격 직후부터는 폭풍처럼 몰아치듯 전 과목 과외와 학원을 돌렸다. 방학에도 학원 스케줄이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끝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좀 말리고 싶었으나, 남의 자식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고 혹시나 기분 나빠할 수도 있어서 자제했다. 괜히 남편을 붙잡고 애가 너무 불쌍하다고 방학에 쉴 틈도 없이 공부만 하는데 얼마나 놀고 싶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언니 말을 들어보면 또 사정은 달랐다. 영어도 말이 한 과목이지 독해, 듣기는 기본이고 회화도 시켜야 하고 수행평가 대비해서 영작 공부도 시켜야 해서 학원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수학도 중3까지 선행을 끝마쳐야 하고 한국사, 세계사도 미리 한 번 싹 훑어야 하고.. 마음먹고 시키고자 한다면 정말 사교육의 세계란 끝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애가 이걸 따라온다는 게 더 신기했지만)


숨 가쁘게 바쁜 초등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내고 결국 입학식 날이 오고야 말았다. 기숙사에서 지낼 짐을 바리바리 다 싸가지고 가서 기숙사 방 정리해 주고 입학식은 잘 치렀다고 했다. 보통의 중학교 입학식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이, 이제 막 초등학생 딱지를 뗀 어린 자녀들을 떼어놓고 집에 돌아가야 할 부모님을 생각해서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마지막에 부모님과 헤어지기 직전에는 아이들에게 절까지 시켰다고 하니 뭐 말 다했다.


애를 학교에 두고 돌아오는 길에 궁금해서 언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언니는 엉엉 울고 있었다. 아직 너무 어린 아가인데, 어떡하냐고 걱정돼서 죽을 것 같다고, 숨이 막힐 것처럼 우느라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하필 입학식 전날 체를 해서 심하게 아픈 바람에 수액까지 맞힌 터라 혹시 애가 아플까 봐 더 걱정이 된 듯했다.


애가 입도 짧고 편식도 심한데, 하루 세끼 학교에서 나오는 밥을 잘 먹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드림렌즈 잘 관리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환절기면 비염 감기를 달고 사는데 어떡하냐고 난리였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애기 보내기 전에 고기 좀 많이 구워먹일 걸.. 하는 언니 말에 나는 달래주다 말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냐면 내가 알기로 그 집처럼 소고기를 자주 먹을뿐더러, 가장 좋은 부위를 수십만 원어치는 족히 사다가 해 먹이는 집은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웬 고기 타령인지 웃음이 나왔다.


애가 못나서 어디 이상한 기관에 맡겨놓고 오는 것도 아니고, 너무 잘나서 좋은 학교 가느라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건데 뭘 그렇게 슬피 우냐고 겨우 달래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결국 그날부터 하루 이틀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보냈다고 들었다.


입학 후 첫째 주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금요일 오전부터 저녁에 잔칫상을 차려주려고 준비한다면서 장을 보느라 바쁘다고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준비해서 먹이고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과외, 학원 수업도 다 취소해 주었다.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고 피곤했는지 주말 내내 집에서 거의 잠만 자다가 갔다고 했다.


그런데 둘째 주부터 언니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 이번 주에는 주말 내내 아이랑 싸우다가 보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엄마는 계속 선행 공부를 시키고자 주말에 잠깐 집에 온 아이를 닦달하며 과외, 학원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 착한 애가 사춘기가 온 건지 약간 반항까지 하면서 일주일 내내 학교에서 힘들었는데 주말에는 좀 쉬면 안 되냐고 대들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입장도 이해가 가고, 아이 입장도 십분 이해가 갔다. 학교 교육과정에 온전히 맡겨놓아도 괜찮지만,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제는 선행을 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꼭 선행은 아니더라도 좀 더 깊이 있게 현행 공부도 시키고 싶은데 그것마저 주말밖에 시간이 없으니 아이가 오면 자연 닦달하게 된다고.


하지만 애 입장에서는 일주일 내내 숨 막힐듯한 일정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가 주말만큼은 좀 쉬면서 에너지 충전도 하고 돌아가고 싶은 게 당연지사인 것이다. 어느 누구의 편도 들을 수 없어서 그저 그랬냐며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2주, 3주가 지나가니 아이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완벽히 적응해 버렸는지 폭탄선언을 했다. 매주 주말마다 집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한 주는 기숙사에 남아있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주말에 삼시세끼 밥도 다 제공되고, 집이 먼 친구들은 주말마다 집에 가지 않고 남아 있는 멤버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랑 같이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싶다고 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몇 주 되지도 않아서 적응해버리다니.


언니는 충격에 휩싸였다. 학교에 들어간 지 한 달도 채 안 돼서, 애가 저렇게 쉽게 적응한 것도 신기하고 이제 갓 초등학생 딱지 뗀 아이인데, 불과 얼마 전까지 엄마 안고 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 하던 애가 주말마다 굳이 집에 오지 않겠다는 선언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를 잘 아는 나도 덩달아 놀랐다.


"정말? 그렇게 쉽게 적응을 해버렸다고? 집에 안 오고 학교에 남아있고 싶어 했다니? 믿기지가 않는데?"


더 놀라운 건 주말이라고 해서 핸드폰을 반납해주지도 않기 때문에 스마트폰 없이 답답한 세상에 살아야 하는데 아이는 그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공부하라고 잔소리 듣느니 기숙사에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건가?'


그 집 아이는 엄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는 성향이었다. 겨울방학에 숨 쉴 틈 없이 하던 학원, 과외 스케줄도 정말 아플 때 빼고는 군말 없이 따라오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학교에 남아 있는 게 더 행복했던 걸까. 내가 알기로 그 학교 생활 패턴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꽉 차 있어서 상당히 피곤할 거라고 들었는데, 그게 더 편했단 말인가.


결국 저번 주말에 아이는 집에 오지 않았고 기숙사에서 편히(?) 쉬었다고 한다. 언니는 과외, 학원 일정을 다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규고사 없는 자유학기 기간에 선행을 최대한 빼야 하는데 진도 걱정을 하면서.


나는 아이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주말마다 집에 와서 과외니 학원이니 쫓아다니기보다 책 읽고 운동하면서 보내는 주말이 아이이게 더 유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1은 선행 진도 걱정하기보다 현행에 충실하면서 사고력을 확장시키고 체력을 키워가는 게 더 중요한 시기이다. 물론 집에서 다니는 학교에 다녔다면 남들 하는 만큼 선행도 적당히 시키고 필요한 과외도 받을 수 있겠지만, 기왕 기숙사 학교에 갔다면 그 시스템에 확실히 적응하고 그만의 교육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걱정 한가득인 지인에게 스마트폰도 안 보고 게임도 안 하고 유해한 거 하나 없이 건전한 취미 활동 하면서 주말 보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선행은 좀 미뤄도 되고 지금 차곡차곡 쌓아둔 것들이 분명 고등 때 저력을 발휘할 거라고 그냥 믿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나저나 우리 집 애도 그 학교에 들어갈 방법 좀 없나. 스마트폰 없이 지내는 중학교 3년은 부모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란 말인가. 언니의 고민이 참 부럽기만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40대되니 운동도 눈치 보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