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라면 충분하오
지인이 벤츠 S클래스를 샀다. 그것도 최고급사양으로. 말만 들었지 실제로 차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편과 친하게 지내는 지인은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차 막히는 시간을 피하고 도로가 한가할 때 출근하려고 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밤늦게 9시가 넘어서 퇴근한다. 휴가도 따로 없어서 쉬는 날이라고는 명절 당일을 포함한 공식 연휴일 몇 번뿐이다.
어찌 보면 우리 집 양반과도 크게 다른 사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근무시간이 더 길고 일이 항상 더 바쁜 것 같다. 게다가 그 친구네 부부도 주말에는 발달문제가 있는 아이를 위해 체험을 데리고 다니고 캠핑을 다니고, 여행을 다니느라 쉴 틈이 없다.
그전에는 남에게 물려받은 국산 중고차를 타고 다녔는데 갑자기 회장님이나 타는 이미지의 고급외제차를 구매하다니 좀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물론 외제차를 살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갖추었다. 쉬는 날 없이 하루종일 고생해서 대가를 치르는 만큼은 버는 전문직이다. 남의 집 사정이야 상관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비싼 차를 사서 부럽다기보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 아껴서 다른데 투자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스치듯 했다. 차는 어차피 자산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감가상각이 크기 때문에 버리는 돈이 아닌가. 마음속으로 혼자 한 생각이지만 참 쓸데없는 오지랖임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지인은 차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했다. 차를 구매하기 전에 일 년 넘게 고민도 했다고 한다. 차의 사양을 세심하게 모두 다 파악하고 있었고 웬만한 자동차 딜러보다 더 나은 수준인 것 같았다. 물론 남자라서 기본적으로 차에 관심도 많은 거겠지만 좀 남다르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상 관심도 없는 차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한참 동안 대화가 오갔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내가 이 차를 타고 아침에 출근할 때, 그리고 퇴근할 때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냥 타고만 있어도 힐링되는 기분이랄까. 이 차 사길 정말 잘한 거 같아.. 후회 전혀 없어요. 너무 좋으니까."
진심을 담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한낱 고철덩어리뿐인 자동차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하루종일 일터에 갇혀 휴가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일만 하며 사는데 그러려면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긴 노동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이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풀린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기분을 관리하는 게 참 중요하다는 걸 요즘 알아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평점심도 필요하고 보통보다 약간은 높은 정도의 긍정 에너지를 품고 있는 상태라면 어떤 일을 맞닿뜨려도 비교적 쉽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매일 아침 내 기분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 스타벅스 커피 한잔 정도는 아까워하지 않고 투자한다는 사람도 많다.
스스로를 위해 소소한 이벤트로서 매일 약간의 투자를 하면서 좋은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지인에게는 아마 차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집 다음으로 비싸고 그런 고급외제차를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능력이 되고 감당할 수 있는 선이라면 그걸 과소비라고 깎아내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큰 돈, 아껴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자기 차를 이야기하는 그 지인의 진심 어린 표정을 보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속단했는가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과소비가 아니라 고생하는 자신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만 듣다가 그 차를 직접 타고 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진다.
'우와.. 나도 이 차 타고 매일 출근하면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