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조용한 절교 선언
나와의 약속을 별거 아닌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이전에도 불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내가 무조건 아쉬운 입장이었다.
가진건 쥐뿔도 없지만 무시당하는 거 싫어하고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내가 왜 참았느냐고? 애 때문이다.
내 애가 부족해서, 내 애가 좋아하니까, 내 애가 외동이라 외로우니까, 내 애가 손꼽아 기다리니까..
오로지 내 욕구와 의지가 아닌 내 아이 때문에, 사회성 부족하고 발달이 느린 아이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느끼는 또래들과 어울리게 해 주려고, 마음 편히 스트레스 풀면서 놀 수 있는 그 귀한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들어주고 싶어서 수 년째 나는 참았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핑계하에 이전에도 약속을 몇 번 파투 낸 적은 있지만,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람이 일하고 애 키우며 살림까지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일은 생길 수도 있는 거라고.
나는 내 아이가 가장 소중하니까, 느린 아이의 발달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우선순위니까 이게 전부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고려할게 많다 보니 또 애들이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행학습시키고 학원진도 맞추는 게 우선순위니까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성 문제도 없고 발달 문제도 없고 아무렇지 않은 정상발달의 아이를 키웠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굽히고 숙이고 들어가면서 한 번이라도 더 만나게 해 주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매하고 철없는 자존심 따위 전혀 내세우겠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내 새끼 잘 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관계를 이제는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인 줄 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온몸으로 체감했다.
웬만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장소로 웬만하면 내가 다 맞추는 게 편하니까, 나는 언제든지 아이를 위해서 이 정도 희생과 헌신은 해줄 수 있는 엄마이고 아쉬운 건 항상 나니까. 그게 관례가 되고 습관이 돼 왔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스케줄 때문에 나는 그야말로 멘붕이 되었다. 아이도 달래야 하고 변경된 스케줄을 어떻게든 경제적 손해 없이 메꾸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다행히 운 좋게 잘 해결되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열받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서운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어이가 없고 뭐 그렇다.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유행이던데, 이번 기회에 나도 혼자만의 조용한 절교를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글러먹은 성격 때문에 '어쩜 이럴 수 있냐 서운하다, 저번에도 그런 적 있으면서'라는 말 한마디 해보지 못했지만, 그래서 이렇게 글이나 쓰고 있지만 곧 죽어도 싫은 소리는 못하겠다. 앞으로 안 보고 살 사이는 아니기 때문에.
그저 매우 소극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조용히 절교하기로. 그리고 애도 나도 이 상황에 적응시키기로.
언제까지나 아이도 스스로 학교나 또래관계에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그런 식으로 채울 수 없다. 이제 더 커버리면 더 자주 만나기 힘들고, 전처럼 더 시간 내기도 힘들어진다.
나도, 아이도 좀 더 독립적으로 맞서야 한다.
더 이상 늘 그랬듯 상대방 일정에 오롯이 나와 아이를 맞춰주면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겠다.
비록 아이는 나를 들들 볶겠지만 좀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나와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 두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