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아이 키우기
아이가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면 나는 묻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이지만 일단 참는다.
안 그래도 힘들게 학교 생활을 해내고 온 아이에게 쉬는 시간에 누구랑 놀았고, 뭘 했는지 꼬치꼬치 묻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책에 나와 있었다.
더욱이 내 아이처럼 사회성이 부족해서 친구 관계에 서툴다면 이런 부분에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 딱히 같이 어울린 친구도 없는데 자꾸 엄마가 재촉해서 물어본다면 또 다른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야기할 것 같다는 생각에 꾹 참는다. 그래도 아이는 곧잘 수업 시간 중에 했던 활동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으면 비교적 자세히 말해주곤 한다. 사실 나는 수업 내용보다는 교우관계가 백배는 더 궁금하지만.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하교하고 집에 와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먼저 쉬는 시간에 놀았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옆 반 친구들 2명과 같이 술래잡기 놀이를 했는데 자꾸 자기한테만 술래를 시켜서 싫었다고 했다. 옆 반의 그 남자 친구 2명도 모두 내가 아는 아이들이다. 친하다고 볼 순 없지만 한 명은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유치원 때부터 놀이터에서 가끔 보던 아이고 엄마도 아는 사이다. 그 엄마와도 친하다고 볼 수는 없고 말 그대로 얼굴을 알고 간단한 대화 정도만 나눠본 사이다.
아이는 그 친구들과 놀았던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울었다.
"친구들이 가위바위보 져놓고도 자꾸 나한테만 술래 하래요. 술래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불공평해요." 내 아이가 좀 억울한 상황에서도 자기 입장을 제대로 어필하지를 못하니 조금 만만한 상대라 여겼는지 멋대로 술래를 시키고 자기들은 도망 다니며 논게 아닌가 싶다.
왜 같은 반도 아니고 옆 반 아이들이랑 쉬는 시간에 만나서 놀았는지도 의문이 들었고, 그 친구들도 내가 알기로는 초1 남자애 치고 예의 바르고 모범생에 가까운 아이들인데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
아이는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했는지 더 울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내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안쓰럽고 속상했다.
일단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고 달래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왜 나한테만 술래 시키냐고 큰 목소리로 말해.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 아이들이 계속 너 말을 듣지 않고 불공평하게 하면 너희랑 더 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그냥 교실로 가버려."
선생님께 전화해서 여쭈어 볼 상황도 아니고, 내가 아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연습시켜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이 대놓고 나쁜 말을 쓰거나 때린 것도 아니고 단지 놀다가 아이를 기분 나쁘게 해서 아이가 자존심이 상한 정도의 일로 연락드리는 건 지나치다.
아이를 속상하게 한 그 두 명 중 한 친구도 외동아들에다가 키는 또래보다 훨씬 크지만 의외로 여리고 순한 면이 있어서 같은 반의 장난이 좀 심한 남자 친구들에게 억울한 일을 여러 번 당해서 엄마가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엄마는 장난이 심한 친구들 중 한 명이 센터 치료받고 있는 것 같다며 자기 아들이 그런 애? 한 테 당하고 집에 와서 울고 상처받아서 화나고 속상해했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순하고 여려서 엄마가 걱정이 많은 남자아이에게 당하고 집에 와서 우는 내 아이는 또 뭔가. 내 아이는 정녕 초1 남자아이들 생태계 먹이 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해 있는 건가.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고, 듣기 싫은 말도 한 번씩 할 줄 아는 아이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하고 숙지시켰다.
다음 날 또 그 옆반 친구들이랑 놀았냐고 물어보니 오늘은 놀지 않았다고 하기에 차라리 잘 됐다 싶었고 웬만하면 같은 반 아이들과 어울리라고 말해주었다.
몇 주가 지난 후에 학교에서 체험학습 가는 날이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꽤 먼 거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기에 하교 시간에 평소보다 학교 앞에 많은 엄마들이 나와 있었다.
아이와 트러블이 있었던 그 엄마도 보였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멋쩍게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그런 나에게 굳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말을 걸었다.
"우리 애들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 알고 있어요?"
몇 주전 그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싶었는데 순간 모른 척하고 되물었다. 이제 와서 얘기하기에는 시간도 꽤 지났고 한 번 그러고 말았기에 그다지 큰 일도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우리 애가 OO 이한테 쉬는 시간에 같이 놀자고 그랬는데 우리 엄마가 너랑은 놀지 말라 그랬어하면서 교실로 들어가 버렸대요. 우리 애가 마음이 여리잖아요. 집에 와서 저녁에 내내 울면서 OO이가 나랑 안 논다 그래서 나 너무 슬프고 속상하다고 해서 달래주느라 혼났어요."
...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에게 그 아이랑 놀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만약에 그 아이들이 너를 억울하게 하고 계속 너만 술래를 시키는 상황이 되면"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상황을 피해버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아이는 다짜고짜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랬어." 말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엄마 앞에서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벌게져서 몇 주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이도 억울해하며 울고 불고 하길래 놀다가 또 그런 비슷한 상황이 되면 그냥 피해버리라고 말해준 거지 절대로 그 아이랑 놀지 말라고 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말하다 보니 왜 내가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
그 엄마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우리 애가 워낙 여려서. 하면서 어색하게 대화가 끝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난감하던 차에 다행히 아이들을 실은 버스가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말을 좀 더 돌려서 하거나,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아이는 언어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직설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해 버린 거다. adhd 특유의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도 나처럼 기분 나쁘고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워한다. 요즘 친구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트러블의 원인은 거의 아이의 "자기 중심성" 때문에 벌어진다. 전두엽의 발달이 미숙한 게 원인인데, 아무리 여러 번 설명하고 말을 해줘도 그 순간에는 이해하는 것 같지만 막상 상황이 벌어질 때면 조절하기 힘들어한다. 이러다가 그나마 놀아주던 친구들 몇 명조차 다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반대로 내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랬어."라는 말을 듣고 오면 앞뒤 상황이 어찌 됐든 간에 굉장히 기분이 상할 것 같다. 물론 아이의 속마음은 전혀 그런 게 아니고 친구와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이 서툴고 미숙하고 때로는 과하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짐짓 놀라면서도 우리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기분 나쁠만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심지어 대견하다고까지 한다. 항상 또래들에게 치여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상처만 받고 올까 봐 그것에만 집중해서 마음 아파했지, 이 아이가 또래 친구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놀라운 거다.
초1 아이들은 덩치가 크건 작 건간에 자기표현이 미숙하고 말이 서툴고 어눌한 느낌이 드는 친구들은 같이 놀기 싫어하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조금 부족한 친구를 배려하고 도와준다는 도덕성이 덜 발달되었고, 다른 무엇보다 일단 같이 재미있게 노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같이 놀아야 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고 게다가 행동도 더 어리게 한다면 우습게 보고 어울리기 싫어한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내 아이만 특별히 배려해주고 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건 엄마의 욕심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속된 말로 "정말 짤 없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에 다니는 이상 앞으로도 또래 관계는 결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영역이 될 텐데, 이 놈의 사회성은 좋아진 듯하다가, 또 퇴행하고를 반복하는 중이다. 간신히 좀 좋아졌다 싶으면 또래 아이들은 이미 저 멀리 한 발치 나아가 있다.
또래 친구 생태계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으니, 최하위는 벗어나 주기를, 살짝 두 번째 칸으로라도 올라가 주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