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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25. 2024

부모라면 연기력도 갖춰야지

자식 앞에서 너무 솔직해도 안된다고

부모로서 갖춰야 할 자격요건은 한 두 개가 아닌 것 같다.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를 제공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의무요, 자녀가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자랄 수 있게 다방면으로 경제적, 정서적 지원을 끊임없이 적절하게 베풀어야 한다.


건강한 자녀라고 해도 부모로서 해줘야 할 의무란 만만치 않은데, 만약 아이가 아프다거나 발달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감은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배가 된다. 때로는 이 의무감이 나를 옥죄어서 숨을 못 쉴 만큼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최근에 아이의 불안증상이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는 이 불안증을 암시하는 몇 가지 행동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매일 자식 걱정하는 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사는데도, 나는 참 어리석게도 약 부작용이겠지, 원래 애가 좀 소심해서 그런 거겠지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래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결핍, 스스로 평범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어울릴 수도 낄 수도 없다는 패배감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불안감이 되어 아이의 생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아이가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은 학교 쉬는 시간이다. 누구랑 어떻게 놀아야 할지, 어떻게 끼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또래들과 웃고 떠들며 어울리고 싶은 욕구는 가득하지만 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 욕망을 꾹꾹 누른 채로 쉬는 시간을 견뎌낸다.


이 문제로 다니는 센터 원장님과 의사 선생님께 의논을 드렸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 주변의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동시에 강조하는 건 바로 이거였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오늘 누구랑 뭐 하고 놀았는지, 재미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육아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저학년 아이들은 친구랑 같이 놀 수도 있고, 혼자 노는 시간도 적지 않을 수 있으니 굳이 단짝친구가 없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물론 정상발달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내 아이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가능한 부분이라고 본다.


아이에게 학교 생활을 자세히 물어볼수록, 스스로 힘들고 상처받았던 순간들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학교란 가기 싫고 힘든 곳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건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너무 힘들다고 토로해도 그것에 동요되어 엄마가 더 울고 힘들어하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한다. 그건 아이의 불안감만 더 가중시키는 꼴이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나는 아이 앞에서 여지없이 다 보여버렸다. 학교에서 뭐 했는지는 최대한 묻지 않으려 했지만 은근슬쩍 다른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물어보기도 했다. 보드게임 했다고 하면 그냥 그러냐고 하면 되는데 꼭 누구랑 했는지 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번에 쉬는 시간이 너무 힘들다고 울면서 전학 보내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하고 아이가 불쌍해서 애 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성통곡하면서 울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엄마의 이런 행동이 아이에게서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걸 심어주게 되고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게 돼버린다는 것이다.



내 발등을 찍고 싶었다. 아이의 그 말에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만 것일까.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고 마음속은 지옥일지언정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아이를 좋은 말로 달래주고 재치 있게 설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온 집안에 난리가 난 것처럼 울고 불고 어떡하냐면서 애를 붙잡고 한참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등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하고 말았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아이에게 다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건 명백히 아주 큰 실수였던 것 같다.


아무리 그 순간 충격을 받아 감정이 주체가 안될만큼 힘들었어도, 최소한 아이 앞에서는 울지 말았어야 했다. 애를 재우고 나서 혼자 뒤돌아 울고 힘들어하더라도 애 앞에서는 좀 더 의연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어른이라면 다 큰 성인이라면 그 정도 감정 제어는 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 마흔 먹고도 그조차도 하지 못하는 나는 참 어리숙한 인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걱정되고 불안해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그 나이 때에는 친구관계가 어렵고 스트레스받을 수 있다고, 그것도 한 때이고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나아질 수 있다고, 그래도 정 힘들면 다른 학교의 전학도 알아봐 줄 수는 있다고 좀 더 어른답게 대처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자면 어느 정도 연기력이 필요한 것이다. 애 앞에서 내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연기력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내 연기력은 참 꽝이다. 가족 앞에서는 본연의 모습을 다 보여줘도 될 것 같고 내 솔직한 모습을 가감 없이 다 드러내도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애를 낳아서 키워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특히 아이가 점점 더 성장하면서 심리 정서적인 케어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가 되니 그런 부분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



남편이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아이 앞에서는 아빠를 인간적으로 깎아내리는 언행은 삼가야 하고, 시부모님 험담도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런 건 따로 친구들이나 동네엄마들 만나서 하는 게 그나마 낫다. 아이 앞에서 내 모든 감정과 속마음을 솔직하게 다 드러내는 건 참 미성숙한 부모밖에 안 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앞으로 좀 연기력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혼낼 때도 달랠 때도 최대한 담담하고 정제된 마음가짐으로 하고, 감정적 소용돌이는 나 혼자서 뒤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도의 위엄을 가진 부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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