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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14. 2024

요즘 자식 걱정을 안 합니다

걱정 총량의 법칙

최근에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 꼽는다면, 아이에 대한 걱정이 크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 4살 적부터 시작된 끝 간데없는 걱정은 내 인생을 꿀꺽 삼켜버릴 만큼 거대한 폭풍우와 같았고 나는 그렇게 불행의 도가니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 차렸다. 발달 장애 맘카페에서 죽치고 사는 게 당연한 일과였고, 휴직을 결심하면서 더더욱 아이에게 오롯이 집중하기 시작했고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갈아 넣으면 아이가 나아지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자기 계발러들이 꿈을 하루에 백번 쓰면 이루어진 다기에 다이어리에 매일 아이가 낫기를 희망하는 꿈을 반복해서 썼다.


한 번 일을 놓고 집에 있으면서 아이만을 바라보고 살기 시작하니, 직장에 돌아가는 게 너무 두려워졌다. 다시 일에 적응하는 것도 큰 두려움이었지만 그것보다 아이가 나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나 없는 시간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도저히 복직할 수가 없었다. 가족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의 치열한 혼자만의 고민 끝에 복직을 결심했고 실행했다.


그런데 일에 적응하면서 바쁜 일상을 지내다 보니 발견한 특이한 사실은 바로 아이 생각을 거의 안 한다는 사실이다. 아침에는 출근과 등교 준비로 바쁘고, 출근하면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가, 퇴근하고 와서 아이를 바라보면 그제야 '아 맞다, 우리 아이 걱정했어야 하는데 내가 하루종일 깜빡했네'하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이다.


아이가 그동안 많이 성장해서 좋아진 것 아니냐고? 글쎄 모르겠다. 처음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 약복용을 시키기 시작한 그 몇 달간을 빼고는 아이의 증상과 성향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등교거부는 한 번씩 있고,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힘들어하며, 딱히 친한 친구라 부를만한 존재도 없는 걸 보면 사회성은 지지부진하고 한 번 꽂힌 주제에 관해 1차원적인 집착 증상을 보이고 아무도 관심 없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혼자서 쏟아내곤 한다.


이제 내가 어느 정도 포기단계에 이른 건지,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극적인 변화는 힘들다는 걸 깨달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걱정에도 총량이 있어서,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걱정의 절대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 걱정을 많이 줄어든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일 안 하고 집에 있을 때는 아무리 내가 걱정하고 고민해 봤자 어차피 애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지 시키고 안 하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또 애 생각만 한다든가, 아이에 관한 글을 브런치에 쓴다는 가하는 게 잦았다. 그런데 이제는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업무에 대한 고민들로 인해 아이에 대한 고민은 자연히 줄어들었다. 물론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들도 많고, 일하는 엄마로서 주기 힘든 애정과 관심을 짧은 시간에 쏟아주기 위해 신경은 쓰고 있지만, 아이 걱정을 덜한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 좀 살 것 같다.


오로지 자식이 내 인생에 전부가 되어, 내 전부를 걸고 느린 아이를 뭔가 정상으로 도달시켜 보겠다는 목표와 꿈을 품고 지내는 일상보다 아이에게 덜 관심을 주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해내야 할 업무와 일이 있는 지금이 훨씬 낫다.


집에서 살림과 육아만 하는 주부라고 하더라도 아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취미나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아이친구 엄마들, 학교 엄마들들이 아예 없는 모임에서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든가 취미를 즐긴다든가 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시간, 남편 자식 생각하지 않고 나만의 영역을 지켜내는 시간이 있어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딱히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모임에 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던 나는 그렇게 지내지 못하고 휴직 내내 가족만 바라보며 지냈다. 그 시간이 낭비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 인간적으로 성장하고 삶의 경험이 되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냥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바쁘게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오후 낮 나절에 만나는 지금이 더 제대로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업무능력이 엄청 뛰어나서 일에서 대단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근근이 내 할 일만 해내는 중이지만 그래도 내가 맡은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그래서 진심으로 잘 해내고 싶다. 아이의 증상이 또 어떻게 될지 몰라 풀타임맘 자리로 돌아와야 할 때가 닥칠지도 모르지만 그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며 육아하며 살림하는 삶을 유지내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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