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ADHD가 내 유전이라니

ADHD 아이 키우기

by 레이첼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연드림에서 장을 본다. 어제 자연드림에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떠오른다.


"맞다! 장바구니!"


다른 마트나 매장도 마찬가지지만 요새는 장 볼 때 따로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일반 마트에서는 종량제 봉투를 구매해서 장바구니로 쓸 때도 있지만, 자연드림 매장에 갈 때는 전용 장바구니를 들고 다닌다.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집에 오면 다음에 나갈 때 또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할까 봐 일부러 현관 신발장 바로 앞에 둔다. 그런데 3번 간다고 치면 한 번은 꼭 놔두고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나는 현관문 바로 두고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아예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집을 나서는 것 같다.


다행히 그럴 때를 대비해서 쓰려고 차에 쇼핑백 몇 개를 놔둬서 그걸로 대체할 수 있긴 했지만 못내 찝찝하다. 쇼핑백은 종이라 아무래도 전용 장바구니보다는 약하고 사과, 배 같은 과일이라도 사면 무거워져서 쇼핑백에 들고 가다가 행여 찢어질까 봐 신경 쓰인다.



그러다 저번 주에는 자연드림에 또 장 보러 갔다가 계산하고 나와서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방금 계산할 때 만난 매장 직원이 "조합원님, 계산하시고 신용카드 두고 가셨어요."라고 말했다.


참담했다. 세상에 놔두고 올 게 없어서 신용카드를 두고 오다니.

나라는 사람 왜 이렇게 칠칠맞은 거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나려고 했지만 최대한 릴랙스 하면서 좋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내 휴대폰 번호를 찾아 검색해서 애써 전화까지 해준 매장 직원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집에서 먼 거리도 아니라 금방 다녀올 수 있음에 또 감사하자고 나를 위로했다. 방금 장 본 소고기 같은 냉장 보관 식품들을 얼른 냉장고에 넣어둬야 하는데 압박감을 느끼며 두고 온 신용카드를 가지러 다녀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ADHD 아냐?"



주말에 리조트 여행 갔을 때에도 가족들과 먹으려고 큰 맘먹고 구매한 비싼 딸기를 결국 놔두고 가서 못내 아쉬워했다. 아직 딸기 제철이 아니라 소고기에 버금가게 비싼 딸기였지만, 조카와 가족들 맛보게 해주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산 건데. 출발하기 전에 냉장고에서 꺼내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결국 출발할 때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릴 적에 엄마, 아빠는 나에게 자주 "나사 풀린 애"처럼 행동한다며 핀잔을 주셨다. 학교 숙제도 스스로 열심히 했고, 학업 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늘 뭔가 못 미더운 구석이 있다고 하셨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비 오는 날 아침에 챙겨간 우산을 제대로 챙겨서 집에 온 적이 거의 없다. 아침에 비가 오다 오후에 비가 그치면 나는 어김없이 우산에 대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집에 와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우산이 족히 대여섯 개는 넘을 것 같다. 다음 날 운 좋게 다시 되찾은 우산도 많기에 수십 개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차를 운전하고 다니기에 망정이지, 우산을 들고 아침에 나가게 되는 날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가 없다. 이 우산을 온전히 들고 다시 집에 오게 될지. 아마 어딘가에 또 두고 오지는 않을까 어렴풋이 어릴 적 기억이 소환되지만, 이내 이깟 우산 따위 하면서 걱정은 접어둔다.


그래서 우산만큼은 편의점에서 파는 3천 원짜리 비닐우산처럼 잃어버려도 억울하지 않은 거,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서 잃어버려도 여한이 없는 것을 사용하는 편이다.


아이도 이런 나를 닮았는지 학기초에는 학교나 학원에 입고 있던 외투를 두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우산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신기하게도 가방은 한 번도 잊지 않고 매고 다닌다. 지금이야 내가 옆에서 밀착 케어할 수 있으니 하굣길에 뭔가가 빠진 것 같으면 당장 되돌려 보내거나, 아이가 싫다고 하면 내가 가서 챙겨 오는데 언젠가는 혼자 스스로 챙겨야 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엄마가 매니저처럼 딱 붙어서 챙겨줄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1학년 아이들 대부분은 이제 하교하거나 학원에 갈 때에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또래의 발달 수준과 자꾸 비교하면 안 되지만 아무튼 눈에 보이는 게 그러하니 나도 조바심이 난다.



아이가 언어 발달 지연이 되면서 자폐 스펙트럼 비슷한 증상을 보일 때에도, 7세에 ADHD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나는 이게 내 유전자에서 비롯된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정신과적 질환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친정 가족과 친척들을 통틀어서도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주변에 한 명이라도 이런 어려움을 겪는 친척이나 주변 사람이 있었다면 나도 사전에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고 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전무하다.



다분히 이기적인 인간인 나는 내 쪽이 아닌, 시댁 쪽 가족 중에 이런 유전자가 있는 건 아닌지 혼자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다가 유력한 후보를 한 명 생각해냈다. 시작은 아버님 댁 큰 아들, 내 남편과는 사촌 관계에 있는 동생인데 어릴 적부터 눈에 띄게 똑똑하고 영리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내내 왕따를 당해서 전학을 다녔고 결국 대안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다. 너무 똑똑해서 친구들이랑 못 어울리는 게 문제,라고만 들었다.


결국 서울대에 입학했고,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반수로 수능을 쳐서 다른 전공을 서울대에서 골라 갔을 정도로 수재였다. 의대도 충분히 갈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사회성으로 인해 아쉽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선택했다고 했다.


아마 정확한 진단명은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 동생분도 사회성이 떨어지고, 자기가 꽂히는 분야에만 집중하는 성미로 봐서는 유아기 때 검사를 했다면 무슨 결과라도 나왔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 유전자를 의심하면서, 내 아이도 그 시댁 쪽 DNA에서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고 혼자 결론 내렸다. 물론 남편에게도, 시댁 식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이기 하지만.


내 유전자는 이 쪽 방면에서는 아주 맑고 깨끗하다고 확신했는데, 어제 문득 자연드림 장바구니를 또 까먹은 나 자신을 보면서 내 유전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나도 경미한 ADHD 환자가 아닐까?

살면서 나 나름의 노하우와 대처 방식이 생겨서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 받지 않을 정도로 나도 모르게 조절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규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돌아다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수시로 하는 그런 과잉 행동, 충동성 ADHD는 아니라 더 알기 어렵다는 주의력 결핍형에 치우친 유형이 아니었을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혼자 산만하고 집중을 잘 못하고, 자꾸 챙겨야 할 걸 잊어버리는 내 아이 같은 유형 말이다.


뇌 발달이 더딘 탓에 운동 신경 발달도 느리고 부족한 게 대표적인 ad 증상 중 하나인데, 나도 운동 신경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몸치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이 가장 싫었고, 어떤 종목을 해도 다 못했지만 특히 구기 종목은 쥐약이었다. 친정엄마는 학창 시절 학교 대표 육상부 선수를 할 정도로 달리기도 잘하고 운동 신경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일까 늘 의문이 들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늘 멍하니 먼 산 바라볼 때가 많았다. 내가 일부러 의지를 가지고 집중하지 않으면 머릿속은 항상 딴생각, 헛생각으로 가득 찼고 특히 공상을 많이 했다. 가끔씩은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힘들어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공부 욕심은 어느 정도 있어서 어설프게 상위권을 유지하긴 했지만 의욕에 찰 때에만 굉장히 열심히 하고, 한 번 놔버리기 시작하면 시험 성적도 나쁠 때가 많았다.


20대는 또 어떤가. <젊은 ADHD의 슬픔> 저자 정지음 작가도 알코올 중독을 이야기할 정도로 술에 의지하면서 산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나도 비슷하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술을 맛보고 취한 기분을 느끼고는 나느 신세계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술 취해서 몽롱한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주 적극적으로 술자리를 만들고, 일부러 취해서 그걸 즐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알코올에 약한 몸이라 늘 다음 날 힘들어서 강의도 빠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내 몸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걸 그간의 무수한 경험으로 충분히 파악했기에 조심하고 자제하게 되었지만.


ADHD의 또 다른 대표적 특징이 주변 정리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나도 옷이든 집안 물건이든 제대로 차곡차곡 종류별, 색깔별로 정리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럴 능력이 아예 없어서 못하는 것 같다. 수납공간이 워낙 잘 되어있으니 뭐든지 그냥 일단 다 수납함 안에 넣어놔 버리니 그나마 봐줄 만하지 서랍을 열면 뒤죽박죽이다. 시간을 내서 의지를 갖고 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으나 역시 내 영역은 아닌 듯했다. 조금 하다가 또 어지르고 마는 것이다. 살림 잘하는 지인들 집에 가보면 밖에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서랍장 내부도 그야말로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면 학을 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렇게까지는 안 되는 것이다. 그나마 잘하는 건 청소기 부지런히 돌리고, 보이는 곳만큼은 정리하는 편이라 부끄럽지 않은 모양새는 갖추고 산다.


내 아이도 정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무조건 어지르고 갖고 노는 건 다 널브러뜨려놓고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유치원 때까지는 정말 심했는데, 지금은 나와 함께 노력해서 많이 좋아진 편이다.



나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라면 어릴 적 친구들도 인정하는 전형적인 "금사빠"라는 것인데,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이성에게도 물론 그랬지만 그 대상은 무궁무진했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지금 그걸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엄청 빠져들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다.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올해 야구장에 처음으로 몇 번 가게 되면서 나는 금세 야구에도 깊이 빠져들었는데, 경기장의 그 뜨거운 응원 열기와 선수들이 안타, 홈런을 칠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아이가 좋아한 탓도 있지만 그 핑계로 매주 한 번씩은 야구장을 찾았고 금방 룰을 배워갔으며 결국 다른 도시의 타구장까지도 원정 응원하러 방문했다. 보통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도 경기장에 자주 관람하러 가고 응원하는 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좀 심하게 빠져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시즌이 끝나면서 어쩔 수 없이 나의 관심도 사그라들게 되었지만.


몇 가지 예로 보니 영락없는 ADHD를 지닌 사람 같아서 허탈하지만, 나는 어릴 적 발달 지연이나 사회성 부족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언어 발달은 빠른 편이었고, 4살 때 엄마, 아빠가 나눈 대화를 할아버지한테 가서 다 일러서 엄마가 시아버지 앞에서 곤란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여러 번 이야기하신다. (아마 내가 너무 어려서 당신들의 대화를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고, 할아버지한테 가서 전달할 거라고는 더욱더 상상하지 못했나 보다.) 사회성 면에서는 나 스스로를 평가해보자면 내성적인 성격이긴 해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늘 함께 놀 친구들이 주위에 있는 편이었다.



그에 반면 내 아이는 ADHD 증상으로 인해 청각적 주의력이 떨어져서 언어 발달이 유의미하게 지연되었고, 그로 인해 사회성 부족, 자존감 저하 증상까지 겪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유전인자가 아이에게 전달되면서 어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발현되어버린 것일까. 스마트폰, 미디어 노출이 그러지 않았으면 발현되지 않았을 그 유전자를 자극하게 된 결정적인 촉진제가 되어버린 걸까. 내가 자라던 80년대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나도 아이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확실한 건 나 자신도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경미한 ad 증상은 지니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살면서 나 나름대로 그런 단점들을 커버하면서 살 방안을 고안해서 크게 지장이 없도록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깨달음에서 얻은 중요한 한 가지는, 내 아이의 증상에 대해 내 책임이라는 의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 집안의 유전자도 아닌데 왜 아이가 이렇게 됐는지 끝없이 의문을 품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 아이는 나를 닮아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 진짜 성숙하려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책임을 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자세가 있어야만, 모든 것을 바꿀 책임도 질 수 있다.


용기를 내보자.

내 아이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자.


문득 자연드림에 장바구니를 놓고 가서 이런 꿈에도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얻게 되어서 되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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