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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28. 2022

우리 가족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완벽한 일요일

ADHD 아이 키우기

토요일 저녁만큼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외식을 하는게 우리집 무언의 약속이다. 오후부터 저녁 메뉴로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제한적이고 식성이 까다로운 8살 아이의 니즈까지 만족시켜야하기에 우리는 외식 메뉴를 정할 때 꽤나 진지하고 신중하다. 평판 좋은 동네 소고기집에 가보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아이도 우리도 모두 만족할만한 식사를 했다. 왠만하면 과식은 자제하려는 편이지만 밑반찬까지 모두 맛있는 식당에서 후식 볶음밥까지 싹싹 긁어먹고 간만에 배가 터질때까지 먹어줬다.



배부른 토요일 저녁을 보내고 일요일 아침.

일요일이라 더 게으름 피우고 싶지만 매일 아침 달리기를 빼먹을 수는 없다. 알람을 듣고도 괴로워하면서 못일어나고 한 숨 더자야지 하다가 결국 7시 30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안돼! 지금이라도 나가야해! 속으로 외치며 이불을 박차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서 뛰었다. 아침 바람은 차갑지만 역시 운동으로 시작하는 아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 주말에도 운동하는 사람이야."라는 자부심과 함께.


평소같으면 일요일에 뭐할지, 어디갈지 대충이라도 미리 생각해두는 편인데 이번 주에는 남편 차를 쓰지 못하는 사정이 생겨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내 차로 움직여도 되긴 하지만 주말에 온 가족이 이동할 때는 남편이 운전해서 다니는 것에 더 익숙하다. 미리 세워둔 일정이 있다면 모를까 딱히 주말 계획도 세워두지 않아서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집콕이나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언어발달에 지연이 오면서부터 근 몇 년간 우리는 주말만 되면 어딘가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 당시 내가 읽은 유아 언어 발달 책에서는 하나같이 바깥에서, 자연에서 많이 놀아주고 경험을 쌓아야 말이 터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주중에 일하느라 해주지 못하는 경험을 주말에라도 채워줘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타고난 집콕 성향의 남편도 아이를 위해서 도시를 벗어나 여기 저기 안가본 곳도 가보고, 각종 체험도 해주고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특히나 발달 지연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아버린 아이의 발달은 부모의 노력 대비 정비례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답답하고 더디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이기에 멈출 수는 없었다.


발달 관련 책을 더 많이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아이를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 다닌다고 해서 언어 발달에 좋은건 아니라는 사실을.


하루 종일 집에 있더라도 엄마, 아빠와 몸을 부대끼면서 몸놀이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말장난도 치면서 찐하게 상호작용을 해주면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한 끼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해서 같이 먹을 수도 있고, 집 앞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주말을 꽉 채워서 보낼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주말을 꼭 아이 발달을 위한 가정 치료의 시간으로 여겼던 나는 매번 "이번 주는 어딜가지, 어디가 좋을까, 요즘 어디가 핫하지."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지 않으면서, 오롯이 집과 동네에서 일요일 하루를 보냈는데도 보람찬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피곤했는지 거의 9시까지 잠에 취해 있었다. 남편은 일어나서 씻고 챙긴 다음, 비장하게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오겠다고 한다. 나는 "토피넛 라떼 시럽 한 번, 저지방 우유로" 메뉴를 주문했고 남편은 고심해서 고른 샌드위치도 자랑스럽게 맛보라며 내놓았다.


그 사이 아이는 일어났고 평소처럼 침대에서 좀 더 안아주고, 뽀뽀 세례를 퍼부으며 누워있다가 배고프다는 말에 급하게 아침밥을 차린다. 9시가 넘었으니 평소보다 밥 시간이 늦어져서 배가 고프겠다 싶었다. 냉장고에는 저번 주에 친정엄마한테 받아온 밑반찬도 든든히 있었고, 거기에 더해 고등어와 미니 돈까스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미소 된장국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큰 맘 먹고 된장국까지 끓였다. 몇 가지 안되는 밥 준비에도 아직 부엌 살림이 서투른 나는 바쁘고 정신없다. 반찬을 직접 만든 것도 아닌데 설거지거리는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건지.




그래도 잘 먹는 아이 모습 보니 뿌듯하고, 아이밥 준비하면서 남편밥까지 같이 차려서 먹이고 나니 오전에는 배고프다는 소리 듣지 않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가족들 먹는 모습 보면서 그제야 나도 토피넛라떼를 한 잔 마시면서 샌드위치도 맛있게 먹는다.


아침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와 거실에서 야구공 던지기, 배구 놀이를 하면서 논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하라고 해도 귀찮은지 못들은체하고 계속 하는데, 아랫집 사람들이 너그럽긴 하지만 층간소음에서 자유로운 1층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밥먹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나에게 살살 다가와 코딩하고 싶다고 애교를 부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슨 또 코딩이야!" 하면서 언성을 살짝 높이니, 또 엄마는 맨날 화낸다면서 억울해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침밥까지 먹었으니 "일어나자마자"가 아니라고 자기만의 논리를 펼친다.

그래도 일단 주말에 게임이나 컴퓨터는 오후쯤 되어서 시키자는게 내 신조다. 아침 나절부터 게임을 하고나면 다른 놀이거리에는 흥미를 잃어버리고 시시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참 고민하다가, 시각적 감각과 시간에 예민한 아이의 특성을 고려해서 오늘의 미디어 노출 시간을 함께 쓰면서 정해본다. 아이의 의견도 조금 반영해주는척 하면서, 내 의도를 다분히 반영하여 작성했다.


코딩은 점심이 지난 시간이 1시에 30분, 로블록스 게임은 오후 5시에 30분, TV 시청은 저녁 9시에 30분으로 정한다. 아이는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이 스케쥴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식으로 하니 아이도 좀 납득이 가는지 당장 하고 싶다고 징징대지 않는다.


물론 말이 30분이지, 게임이든 코딩이든 한 번 시작하면 한 시간은 우습게 지나가기 때문에 4-50분은 너그러이 눈감아 주는 편이다.



게임 시간도 정해졌겠다, 기분이 좀 좋아진 아이에게 동화책 두 권 읽자고 꼬드긴다. 초1이면 스스로 독서도 할법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루에 두 권은 읽어주려고 한다. 과학 전집에서 로봇 주제의 책을 스스로 두 권 가져오기에 기쁜 마음으로 읽어 주었다.



책을 읽어주고 어지러워진 집안이 눈에 들어온 나는 세탁기를 돌리고, 로봇 청소기도 돌리며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니 남편이 조용히 내 눈치를 보더니 아이에게 자전거 타러 나가자고 한다. 처음에는 나가기 싫다고 했지만 계속 설득하니 순순히 따른다. 저번에 자전거 타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골절된 탓에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 두발 자전거 타기에 성공했는데, 잠깐이라도 타야 감도 되찾고 균형감각도 키울 수 있으니 겨우 설득해서 데리고 나갔다.



ADHD를 겪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뇌 발달에 지연이 오는데 특히 뇌의 운동 신경 영역 발달도 연관되어서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남들은 쉽게 타는 자전거도 페달을 밟으면서 균형을 잡는 일, 줄을 돌리면서 박자에 맞춰 점프를 하는 줄넘기도 이 아이들에게는 유독 어렵다. 줄넘기와 두발자전거를 떼는 일이 올해 아이가 해내야할 과제였는데 우리 아이는 다행히 모두 해냈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와 집앞 자전거 도로까지 돌고 왔다. 그 사이 나는 청소하고,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대충 집안 정리를 했다. 잠깐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요새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들고 두 장정도 읽기 시작하는데 남편과 아들이 왁자지껄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책을 더 읽고 싶은 아쉬움이 들지만, 나중에 또 읽으면 되니까.


금세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 아이는 노트북을 가져다 코딩을 시작하고, 우리 부부에게도 잠시 쉴 틈이 생긴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 혼자 스마트폰을 보고 나도 내 할일을 한다.

코딩을 하고 나니 이내 배고프다고 하는 아들녀석. 아빠가 라면 끓여먹자고 아이를 꼬신다. 내가 안된다고 정색하니 눈치를 본다. 한 발 양보해서 밥과 반찬을 절반 먹고 라면은 1개만 끓여서 곁들여서 조금씩만 먹기로 합의를 본다. 요리에 전무한 남편이지만 라면만큼은 자신이 전문가라 지칭하며 직접 끓여주는 수고를 해준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안 먹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갓 끓인 라면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 젓가락 이상을 먹어버린다. 아이에게까지 주고 나니 막상 턱없이 부족해진 라면에 아쉬운대로 밥을 말아 먹는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왠일로 남편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원래 하루 할당량은 두 권이라 아이는 그 이상 읽으려고 하지 않는데 오늘만큼은 재미있게 읽는다. 언어 능력 발달에 독서만큼 유익한게 없다고 했는데, 아빠와 책 읽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일요일이지만 어디 외출이라도 다녀오면 막상 피곤하고 정신없어서 책을 여유롭게 읽을 시간이 없는데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남는 시간에 책이라도 읽게 되니 좋다.




오후에는 동네 뒷산을 등반하기로 한다. 남편은 내키지 않아하는 눈치다. 아침부터 아이랑 자전거 타러 나갔다 오고 스타벅스도 다녀오니 피곤해하는 것 같다. 나는 끝까지 모른척 했다. 피곤해서 낮잠 한 숨 자고 싶다는 남편을 끌다시피하면서 데리고 나온다.


등산도 발달이 느린 아이에게 매우 유익한 운동이다. 포장되지 않은 흙과 돌을 밟으며 경사진 길을 걸을 때 우리 뇌는 발의 압력과 각도, 보폭을 끊임없이 미세하게 조정해야 한다. 이런 적응이 뇌의 신경 회로를 본디 진화된 방식 그대로 자극한다. 발달이 느린 아이들은 당연히 뇌 발달에도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최고의 운동 중 하나가 등산인 것이다. 작년부터 동네 뒷산 등반을 시작해서 한 달에 두 세번은 다니는 중이다. 동네에 있는 산은 왕복 한시간여거리로 아이랑 다니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높이와 거리다. 운동 많이 하는 성인에게는 부족하다 싶은 높이와 거리지만, 우리 동네에 아이와 다닐만한 산이 있다는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창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같은 센터에 다니는 아이 친구 가족을 만났다. 이 친구의 부모님도 발달이 조금 느린 아이를 위해서 참 여러모로 애쓰시는 분들이다. 부모의 눈물나는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저 친구도 하루 빨리 나아지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정상에 다다라서 벤치에 앉아 물과 가져온 과자를 먹는다. 늦가을에는 등산하는 사람이 많아서 산정상도 앉을 벤치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다. 더 걷기 싫어지기 전에 다시 하산한다. 등산을 다녀오니 오후 4시가 갓 넘은 시간이다.


남편은 미용실에 가고, 아이는 로블록스 할 시간이라고 한껏 신이 나 있다. 아이가 게임을 하는 동안 저녁 반찬을 만들고 씻고, 집 정리를 한다. 한시간여 가까이 게임을 했는데도 끝낼 때가 되니 못내 아쉬운지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 한 시간이 오분같이 느껴져."

"원래 그런거야. 너무 재밌는걸 할 때는 시간이 빨리 가는 거야."


게임은 항상 이렇다. 할 때는 너무 즐거운데 정해진 시간에 끄는 일이 아이에게는 너무 힘들고, 그걸 받아주는 나도 힘들다. 내가 아무리 집에서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써도 결국 학교와 학원에서 또래나 상급생들이 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에 백퍼센트 순결무구하게 게임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기란,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할 수 있는거라곤, 최대한 타협을 잘 해서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있도록 조절력을 키워주는거랄까.

이게 할 때마다 더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기조절력이 생기는건지 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미용실에 다녀온 남편은 아이가 좋아하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한아름 사오고, 우리 가족은 각자 좋아하는 맛을 골라 맛있게 먹는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부엌을 치우면서 순간 나는 오늘 하루 세끼를 다 집밥으로 해먹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에게 하루 세끼 밥하는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소연 하니 다음 주에는 한 끼는 사먹자고 나를 달래고는 아이 목욕을 시킨다.


부엌 정리를 마치고 셋 다 씻고 나니, 밖은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나는 아이와 책 두권을 더 읽어주고, 남편은 몸놀이를 하면서 잠깐 놀아주었다. 이제는 티비 좀 보여줘도 되겠다 싶어서 티비를 틀어주니 아이는 신나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보고 남편은 누워서 폰을 본다.

나는 같이 아이랑 티비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운동도 했지, 등산도 했지 평소 하던 운동량을 초과했다. 내 평생 이렇게 운동을 많이 한 적은 없었는데, 나이 들어서 시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꾸준히 하면 더 건강해지겠지 싶다.

아이도, 남편도 오늘 하루가 피곤했는지 9시가 갓 넘긴 시간에 우리 가족은 불을 끄고 잠이 든다.




비록 차를 타고 어디 멋진 곳으로 간 것도 아니고, 매일 보던 풍경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니지만 오늘따라 왠지 완벽한 주말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굳이 어딘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구나. 멀리 여행을 다녀온 날은 재충전도 되고 재미있긴 하지만 일단 피곤하다. 피곤하면 서로 날카로워질수밖에 없다.

오늘은 남편과 한 두번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언성이 높아질 정도는 아니었으니 무난하게 지나간 편이다. 주말에 하루 종일 같이 있다보면 서로의 말과 행동이 견디기 힘든 순간이 한 번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런게 행복이지.

별 특별한 일 없는, 아주 평범한 일요일 하루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완벽했고, 소소한 행복도 느꼈기에 충만함이 차오르는 그런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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