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살 팔자

결혼생활 이야기

by 레이첼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점 한 번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전형적인 이과 성향인 이 남자는 1년에 한 번씩, 연초가 되면 사주나 점을 보고 싶어 한다.


결혼 전에 궁합을 시부모님이 한 번 봐주셨고, 결혼 후에는 친정엄마가 한 번 힘든 일이 있을 적에 가서 대신 우리 가족 사주까지 봐주시긴 했다. 갈 때마다 레퍼토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희는 걱정할 것도 없고 부자로 잘 산다더라, 사위만 잘하면 된단다, 너 자궁이랑 위가 약하니 건강 신경 쓰란다." 신내림을 받은 곳인지, 아니면 태어난 연월일로 사주풀이를 해주는 철학관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용하다는 곳에 가서 보고 온 거라고 듣고 온 말을 맹신하시며 엄마 자신의 확고한 의견까지 덧붙여서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실 엄마도 그런 거 자주 보면 복 나간다고 꽤 오래전에 한 번 보고 말았는데, 최근에 외손주가 발달 문제로 병원과 센터를 다니고 그로 인해 내가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어디 가서 물어보고 싶으셨는지 두 번 정도 가보신 듯했다. 가는 점쟁이마다 손주 걱정은 하지도 말라고 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아무 탈 없이 잘만 클 거고 나중에 외국 가서 공부할 거라고 했다면서 여러 번 나를 안심시키고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다 잘되려고 지금 좀 힘든 거라고 위로하면서 엄마 본인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신듯했다. 손주 사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딸과 사위겠도 한 가족이니 같이 봐주셨는데, 남편은 자기 사주 결과를 듣는걸 굉장히 재밌어하고 흥미로워했다.


지금 업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동종의 새로운 업장이 들어왔을 때 몹시 불안해하면서 점을 보고 싶어 했고, 최근에는 우리 집 매매가의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학군지로 이사를 고려하면서 또 불안하고 고민이 되는지 점을 보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철학관도 아니고 아예 신내림 받은 용한 곳에서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런 곳이 어딘지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막상 나는 내가 직접 그런 점을 보러 가본 적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다. 점집 특유의 제사상 차려놓고 화려하게 꾸며놓은 그런 분위기가 낯설기도 하고 좋은 말만 들으면 상관없지만 행여 조금이라도 부정적이거나 염려되는 말을 듣고 오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서이다. 설사 90퍼센트가 좋은 말이었다고 해도, 딱 하나가 부정적인 말이면 그것에만 꽂히는 게 보통 사람의 성향이고 특히 내가 더 그렇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친정엄마에게도 말씀드려봤더니 별로 내키지 않으시는지, 연말이니 연초에 천천히 한 번 가보자고만 하셨다. 결국 남편은 유명하다는 철학관에 결혼 날짜 받으러 간 지인과 사주풀이를 듣게 되었다.

나는 그런 운명 따위 관심 없다고 내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가봤다고 하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거기서 뭐라고 말했는지 토씨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말해보라고 닦달했다.





다음 국어사전





사주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과 이사 관련해서는 어차피 우리가 생각했던 흐름대로 이야기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고, 가장 크게 강조한 건 부부간에 충돌운이 있기 때문에 헤어질 운도 있어서 서로 간에 말조심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특히 남편이 마음은 여린 편이기는 한데, 평소에 자기도 모르게 말이 세게 나가는 편이라서 더 조심해야 하며 웬만하면 아내에게 맞춰주고 많이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어딘지 몰라도 이 부분은 참으로 용하게도 잘 맞췄다 싶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선하고 착한 성향의 사람이긴 하지만 한 번씩 굉장히 냉소적으로 말해서 정 떨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를 어찌 간파했을까 싶다. 사주팔자에 정녕 이런 성격적인 부분까지 다 나온다니. 아무튼 마음에 드는 구절이었다. 남편도 인정하면서 조심해야겠다고 말했으니,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이는 봄에 태어난 불인데,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한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말했고 공부운도 들어있어서 직업적인 운도 좋은 편이라고 했다. 이건 어느 누구에게나 할법한 아주 일반적이고 대략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래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보단 훨씬 듣기는 좋았다. 나는 속으로 사주에서 발달장애나 ADHD는 예측이 안되나 보다, 생각했다.


나에 관해서는 워낙 부지런하고 운을 타고나긴 했는데 몸이 약한 편이라 항상 병원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한다고 그런 면에서 남편을 잘 만났다고 했다. 내가 몸이 약한 편인가? 체력이 약한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주 골골대며 병원에 다니는 정도는 아닌데 왜 약하다고 한 건지 모르겠다.

임신 과정에서 말기에 자궁에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가 개월 수를 못 채우고 너무 작게 태어나긴 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뇌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이가 지금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닌가 혼자 여러 번 자책하고 의심했는데, 산후 검사에서도 둘째를 임신할 경우 또 비슷한 케이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몸이 약하다고 말하는 거면 인정하겠다. 여자에게 있어 자궁의 건강이 몸 전체의 건강과 직결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재물, 건강, 성격 등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끝으로 마지막에 그 철학관에서 강조한 말이 참 웃겨서 기억에 남는다. 아내가 돈 쓰는 재미에 사는 사람이니까 절대 돈 많이 쓴다고 눈치 주지 말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게 놔두라고 했단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살 팔자니까 절대 눈치 주지 말고 무조건 양보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너무 웃겨서 남편도 나도 빵 터졌는데 곱씹을수록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은 나에게 앞으로 절대 눈치 안 줄 테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라면서 괜히 아량을 베푸는 척했다. 내가 휴직 중이라 월급도 못 받고 있는 상황이니 쇼핑할 때 아예 눈치를 안 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값어치 있는 물건을 살 때는 미리 합의를 하고 사는 편이라 딱히 굽실대며 눈치를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철학관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주니 남편도 자기가 은근히 눈치를 주지 않았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 같아서 내심 좋긴 했다. 어찌 됐건 경제력이 없는 쪽이 경제력이 있는 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자본에서 권력이 생긴다는 건 우리 같은 일반 가정에서도 다분히 적용되는 논리일 수 있으니 말이다.


점점 나는 그 말에 반기를 들고 싶은 욕망이 천천히 차올랐다.

내가 남편이 벌어다 줄 돈을 쓰고 살 팔자라니?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평생 의존하고 굽신거리면서 사는 존재라고 내가?


결혼 전, 후에도 아이 육아를 위한 휴직 기간 빼고는 쭉 일을 했고, 남편이 버는 돈과 비교하자면 절대적 수치는 적은 돈이라고 해도 이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는 가정도 있다. 나는 내 직업에 자부심이 있고 계속 일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얼른 아이가 좋아져서 다시 복직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전업주부보다 월급 노예라고 조롱당해도 좋으니 내 일터에서 내 이름으로 불리며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며 노동의 대가로 돈도 벌고 싶다. 경제적 자유를 일구어내서 내 시간 다 바쳐 일하지 않아도 불로소득이 펑펑 들어오는 삶도 부럽다. 행여 하루 8시간 직장에 나가 하루 종일 내 시간을 바쳐 일할 필요가 없게 되더라도 글을 쓰든, 온라인 콘텐츠 일을 하든 수익을 낼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호위 호식하며 산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사주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연락하며 지내지 않는 어릴 적 친구 중 한 명은 눈에 띄게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그대로도 예뻐서 남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는데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한 두 군데 성형까지 하니 더 완벽하게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대학 입시는 실패한 편이지만 원래 공부도 잘한 터라 대학원은 이름 있는 학교로 가서 공부도 오래 했다. 하지만 전공 선택이 잘못됐는지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고, 20대는 대학원생이라는 간판으로 보내다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결국 바로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가 사주를 보러 가면 항상 듣는 말이 "얘는 자기가 스스로 돈 벌 일이 없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는 팔자"라고 해서 엄마가 속상해하셨다고 했다.

그 사주 운명이 맞아떨어졌는지 실제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전업주부로 남편과 잘 살고 있다. 하긴 눈에 띄게 키 크고 예쁜 이 친구가 아침부터 헐레벌떡 출근 전쟁을 치르며 아이를 맡겨두고 출퇴근하며 일하는 워킹맘의 모습으로 사는 것도 참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이다. 그 친구는 정말 우아하게 집에서 꽃꽂이나 하며 사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카타르 월드컵 기간이고, 우리나라와 포르투갈 경기까지 있어서인지 축구선수 호날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인성 논란도 있고, 말 많고 탈 많은 선수이지만 그만큼 실력은 월드클래스이기 때문에 관심이 워낙 집중돼있는 탓인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호날두의 연봉과 재산까지 나오는 장면을 봤는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축구 선수 연봉뿐 아니라 광고 수입까지 하면 못해도 1조는 벌고 은퇴를 한다는 것이다.

호날두 못지않게 주목받는 사람이 바로 그의 여자 친구인데, 구찌 매장 직원으로 일하다가 호날두의 눈에 들어와 연인이 되었다. 다른 간판 하나 없이 그저 "호날두 여자 친구"이라는 이유로 인플루언서가 되어 광고를 찍고 온갖 패션쇼에 초대받고 넷플릭스 리얼리티까지 찍었다고 한다. 여행 갈 때도 공항에 갈 필요 없이 호날두 전용기를 타고 다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녀가 한 달에 호날두에게 받는 용돈까지 나와서 더 놀랐는데 자그마치 1억이 넘는 돈을 그냥 "용돈"으로 받는다고 한다.


이 정도는 돼야 남자가 벌어다 주는 돈 쓰는 팔자가 아닌가. 조르지나 사주를 넣으면 그런 팔자라고 나올까 사뭇 궁금해졌다. 어차피 외국인은 시차도 다르기 때문에 태어난 날짜와 시를 넣는 방식으로 사주를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할 거야, 운명 따위 믿지 않아라고 말하는 강인한 개척자의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사주는 그저 사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사주는 참고만 해야 한다. 내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이 내 운명을 정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미신을 숭배하고, 미신이 깊숙이 지배해 있을수록 미개한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우리가 미신에 의존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이라고 뇌과학 박사 정재승 교수는 말했다. 점 보러 다니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내 일상에서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해나가는 게 훨씬 더 낫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주 결과는 궁금해하는 나 자신도 모순덩어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남편도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 편은 아니라서 자꾸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불안하고 걱정이 되기 때문에 점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막상 시련이 오거나 인생에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합리적이지 않은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


나라도 강한 멘탈로 무장해야겠다. 어떤 상황이 와도 지금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 잘될 거라는 강한 믿음을 억지로라도 나 자신에게 주입시켜놓아야겠다. 내 멘털을 키우는 게, 사주 보는 것보다 더 손해보지 않는 장사인 것 같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고 사는 팔자가 아닌, 남편이 내가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살 팔자로 한 번 살아볼 수 있게 해 줘서, 그 철학관 사주가 제대로 틀렸음을 자랑스럽게 증명해 보이고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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