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
황소 레벨테스트 결과가 나온 날 교육관련 채널과 카페가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다. 붙었네, 떨어졌네하는 말들이 오가는듯 했다. 어차피 내 주관심사가 아니라서 자세히 본 적도 없는데도 내 SNS 추천글에 뜰 정도면 사교육 좀 시킨다는 그 세계에서는 아마 굉장히 커다란 행사였나보다 짐작만 했다.
잘 모르지만 합격한 집은 경사가 난듯 했고, 불합격한 집은 실의에 빠진 분위기임은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전반적인 교육 소식에는 관심이 있는 편이라 관련 업데이트가 올라오기는 하는데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나 7세 고시 결과들도 부쩍 올라올 때가 많다. 나에게 그 모두는 그야말로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일 뿐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관련도 없는 소식들이다.
우리집 아이는 황소나 영유는 커녕 발달치료를 여전히 받고 있기 때문에 영수학원을 보낸다는건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여전히 학습은 쿨하게(?) 포기할 수는 없는 영역이기에 학교 공부 따라갈 정도의 학습지만 시키고 있지만 또래 학년의 정상발달 친구들을 보면 초4정도 되니 슬슬 예체능은 빼고 영,수 집중으로 돌리는 분위기다.
아이의 전인적인 발달을 위해서 여전히 예체능 교육도 힘쓰는 학군지 부모들도 있겠지만,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의 가정이 훨씬 많기 때문에 초등 고학년이 되갈수록 슬슬 가지치기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는 사교육은 국영수다.
이런 판국이지만 우리집 애는 영수학원에 발을 디뎌본 적도 없다. 나에게 다들 물어본다. 대체 언제 영수학원을 보낼거냐고. 심지어 같이 발달센터 다니는 엄마들조차 영수 사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학원이나 과외를 시작해보겠다고 한다.
발달이 느려서, 언어치료를 아직 받고 있으니까, 사회성이 부족한데 학원에서 치일까봐 등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단연코 가장 주된 이유는 아직 아이의 멘탈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는 아직 영어나 수학 단과학원에 다니면서 강사의 일방향적인 강의와 설명을 듣고 교재에 정리하면서 문제를 풀고 틀린 문제가 남으면 남아서 풀릴 때까지 풀고, 정해진 숙제의 양을 소화할 수 있는 멘탈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
집에서 서술형 수학문제 몇 개만 풀려봐도 금방 아이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는걸 볼 수 있다. 심지어 공부학원이 아닌 피아노가 이론 보충학습으로 몇 분만 더 남아서 공부하자고 하면 징징대고 울면서 늦게끝내준다고 힘들어한다. 이런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공부만 시키는 단과학원에 다닐 수가 없다. 영어든 수학이든 내용을 암기하고, 이해하고, 많은 문제를 풀고 틀린건 또 풀게 하는게 사교육의 목적이다. 물론 개별로 봐주는 식의 지도를 하는 곳도 있고 강의식이 아닌 자기주도식으로 운영하는 학원도 분명히 있지만 결국은 학습적 이해,암기,문제풀이라는 사이클은 매한가지라고 본다.
무엇이든 견디고 자기가 좀 못하더라도 참고 인내하면서 배우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신력, 소위 멘탈이 받쳐줘야하는데 아이는 한없이 유리멘탈이라서 선뜻 시작할 수가 없고 본인도 이제는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태권도와 피아노는 여태 포기하지 않고 싫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보냈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진도가 나간건지 초1에 시작했던 피아노가 벌써 체르니40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이 정도면 애가 나보다 더 나은거 아닌가"싶었다. 나는 체르니40까지 배우지 못했고 당시만해도 그 정도까지 피아노를 친 친구나 언니들이 있으면 부러움과 더불어 존경심까지 들었다.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오랫동안 칠 수 있지,하는 경외감 비슷한게 들었던 것 같다. 그걸 내 아이가 해내다니. 엄마보다 훨씬 낫다 싶었다.
어차피 소근육이 약해서 피아노는 꾸준히 시키려고 하던 차였는데 기왕 이렇게 된거 평생 취미가 될 수 있게, 나중에 성인되서 나처럼 다 까먹지 않게 중학교 가기전까지는 계속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렸을 때 잠깐 다니다가 여차저차한 이유로 그만뒀던 태권도를 다시 시작한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합류해서 그런지 동생들이나 또래에 비해서 등급이 너무 낮았다. 하지만 세심한 관장님의 배려로 금방 적응했고 태권도에도 취미를 붙였다. 어차피 감각통합수업을 따로 데리고 다닐 여유도 안되고 일대일 체육도 알아봤지만 우리 지역에는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해봐야 주1,2회 수업이 될 터였다.
매일 꾸준히 하루 한 시간씩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는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라서 차라리 동네 태권도에서 그 필요를 충족하는게 가성비로보나 여건적으로나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태권도 검빨간띠는 도장 다니는 애들은 아무나 다 하는건줄 알았는데 그것도 일정한 품새 훈련을 거쳐 따로 국기원 심사까지 봐야 획득할 수 있는 '훈장'같은 거였다. 아이는 품새 훈련을 위해 매일 저녁 보강 훈련을 한 달이상 다녔다. 추운 날씨에도 훈련이 끝나면 땀이 범벅이 될 정도로 열심히 임했다. 나오면서 안 하고 싶다고일품 안 따고 포기할 거라고 울고 불고 징징대는 날도 많았다. 달래느라 지칠 때도 많았다. 이럴거면 다 때려치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도 또 참고 잘 어르고 달래고 노력했다.
결국 긴 훈련기간을 견뎌내고 국기원 심사까지 봤다. 전날부터 당일 심사까지도 아이는 너무 긴장하고 떨려했다. 심사장에 가보고 세상에 이렇게 태권도장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품을 따려는 어린이들이 많다는것에 또 놀랐다. 멘탈 붕괴되서 품새 다 까먹는 최악의 사태가 올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긴장감을 이기고 훈련받은대로 해내주었다.
자랑스럽다. 누군가는 남들도 다 따는 일품이고, 피아노 다니기만 하면 체르니 40치는건 누구나 하는거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아이라서. 그것도 발달지연으로 치료받는 느린 내 아이가 해낸거라서 말도 못하게 자랑스럽다. 느린 아이지만 별 문제 없이 자랐던 내 어린 시절보다 더 많은걸 해내고 있으니 여러 모로 나보다 더 나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아마 나보다 더 나은 어른으로 자랄 수 있지도 않을까, 한 줌 희망도 가져본다.
내 또래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주된 화제는 영재원, 영수학원, 영어레벨테스트, 문해력학원 등등 점점 학습으로 치우쳐가고 있는 분위기지만 거기에 끼지 못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아이에게 맞는 교육이 있고 또 내 기준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있다. 세상의 기준과 좀 맞지 않아도 천천히, 우리의 기준을 만들어가면서 아이를 믿고 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