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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망했어,라는 말

욕보다 더 듣기 싫은 이유는

by 레이첼쌤

애가 학습지를 풀다가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가 있다. 인내심과 끈기가 부족한데다 충동성마저 타고난 이 아이는 조금이라도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곧장 짜증을 내기 일쑤다.


옆에서 도와도 줘보고 좋은 말로 타일러도 봤지만 매번 짜증내고 화를내다가 울기까지 하니 나도 지레 지쳐서 그럴거면 다 때려치라는 육아 공식 사전 최악의 말을 던져버리는게 부끄러운 일상의 모습이다.


그런데 요새는 그 과정에 이런 말도 한다.


“아씨,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내 인생 망했어 진짜.”


하아. 이 말이 너무도 깊게 내 마음에 꽂혀온다.

아니, 이만한 일도 인생이 망했다니.


이제 막 십년어치의 인생을 살은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도 과격하고 절망적인 언어다.


문제 하나 안 풀린다고 인생이 망했다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거냐고, 그런 말 하는거 아니라고, 공부는 못해도 좋지만 인생을 이미 망했다고 단정짓거나 포기하는듯한 말은 그렇게 쉽게 함부로 하는게 아니라고 한참을 설교하면서 혼내는듯 달래는듯 잔소리를 늘어놨다.


막상 아이는 그냥 가볍게 나온 소리인데 엄마가 별스럽게 뭘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가 싶은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아마 학교에서 또래아이들이 많이 쓰는 말인것 같다. 많이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나오는 말.

욕설도 비속어도 접할 수 밖에 없는 나이가 된거다. 이외에도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는듯한 자조적인, 그리고 암울한 시대상을 듬뿍담은, ‘탈출은 지능순’ ‘헬조선’ 종류의 언어 말이다.


왠지 그 말이 너무 속상했다.

어떠한 순간에도 인생을 쉽게 망해버렸다고 짐짓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학을 좀 못하더라도, 경시대회에 나갈만한 실력이 아니더라도, 특목고를 못 가더라도, 스카이 대학에 못 들어가더라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것.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나갈 수 있고,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절망적이더라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 짧지 않은 삶에서 배운 이런 명제들을 아이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마 ‘힘들어죽겠네.’ ‘배고파죽겠어’ 이런 말처럼 설령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더라도 흔히 내뱉는 정도의 가벼운 표현일 수 있고 내가 너무 진지하게(?) 그 말에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자주 ‘인생 망했어’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다보면 결국 진짜 망해버릴지도 모른다.

이미 망해버린 인생, 힘들여 살 필요가 뭐가 있는가. 대충, 되는대로 무책임하게 뭉개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수동적으로 살아지는대로 살면 끝 아니겠는가.


사실 내 아이가 ‘언어발달지연’ 진단을 받고 각종 문제행동과 사회성 부족을 경험하며 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하나밖에 없는 자식 인생 망했구나, 그 아이를 낳은 나 역시 이제 망했구나, 애 뒤치닥꺼리만 하다가 보람도 없이 장애아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이 세상 끝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때 포기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한심한 수준이었지만, 학창시절에도 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냥 무턱대고 최선을 다해서 나를 지우고 오로지 아이 발달이 하나 남은 삶의 미션인것처럼 매달렸다.


그 시기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냥 망했다고 간주하고 체념했다면 지금 현재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토록 발버둥치던 시기가 있었기에 삶에 대해 배웠고 내 스펙트럼은 반강제로 넓어졌다.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된지는 모르겠지만, 시련 앞에 더 강해졌음은 틀림없다. 불행은 사람 가리면서 나타나지않는다는 간단한 진리도 깨달았다.


그러니, 내 아이도 쉽게 인생 망했다는 생각도, 말도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철없는 유행어라 치부하기엔 그 말은 너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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