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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덕분에 쓰레기 줍기까지 해보고

느린 아이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

by 레이첼쌤

아마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지구 환경 오염에 대해 배웠나보다. 최근들어 아이는 자주 태평양 한 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속 이렇게 가다간 지구가 못 견디고 다 파괴될 수도 있다는 둥 환경오염의 위험성에 대해서 뜬금없이 한 번씩 이야기하곤 했다. 그냥 영혼없이 그래 맞어,하면서 받아주곤했는데 급기야 환경 보호를 위해서 뭔가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 쓰레기 줍기용 집게가 있냐고 몇 번을 물어보더니 주말에 다이소에 사러 가자고 성화다. 얘가 또 왜 갑자기 이런거에 꽂혀가지고 이 난리지 싶었지만 비싼 돈 드는것 아니니 그냥 응해주기로 했다. 다이소에 가서 이천원짜리 환경정화용 집게를 구매했다. 정말로 하고 싶어서 그런건지 믿을수 없었지만 만약 안 쓴다고 하더라도 이천원정도는 흔쾌히 낭비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라고 산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주말 아침에 눈뜨자마자 아이는 정말로 아파트 단지에 쓰레기 줍기를 하러 나갈거라면서 아침밥을 먹자마자 부지런을 떨었다. 피곤해죽겠고, 이제 막 아침밥 먹은거 치우고 설거지 마치고 좀 쉬려는데 왜 또 나를 이렇게 괴롭히나 싶어서 최대한 못들은척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좋은 일 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열정을 무시하기는 또 좀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챙겨서 나갔다.


날씨도 쌀쌀한데 쓰레기 담을 비닐봉지 하나 들고 장갑 끼고 집게를 들고 애랑 둘이 단지를 돌아다니기가 왠지 옹색했다. 하기 싫었다. 내 팔자에 쓰레기 줍기를 다 해보다니. 어디 기관이나 단체봉사활동으로 해본적 말고는 단 한번도 내 인생에서 자의로 이런 봉사활동을 해본적이 과연 있었나.


아이는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쓰레기 줍기에 응했다. 여기저기 열심히 쓰레기를 찾아다니면서 집게로 정성스레 주워서 봉지에 담았다.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따라다니던 나도 결국에는 눈에 띄는 쓰레기들을 발견하며 좋아서 줍고 담고 했다.


쓰레기 중에서 단연코 가장 비율이 높은건 담배꽁초였다. 담배를 피고 함부로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전날밤 누군가 피운 담배 쓰레기 뒤치닥꺼리를 하는 기분까지 들어서 좀 불쾌해지기까지 했다. 누구는 피고 버리고, 누구는 이렇게 줍고 다니다니. 이렇게 불균형한 도덕성이라니. 너무나 열심히 담배꽁초를 줍고 흐뭇해하는 아이 때문에 왠지 화까지 날것 같았다. 높은 비율로 흡연자들은 아무렇게나 꽁초를 버릴정도의 낮은 도덕성을 지닌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분석을 하게 됐다.


사십분 정도 단지를 돌아다니다보니 피곤하고 지쳤다. 아이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더하자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이도 힘들었는지 기꺼이 이제 그만하자고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해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어쩌다 나는 이토록 착한 애를 낳은걸까.

누굴 닮아서 어쩜 이렇게 마음이 순수하고 착할 수가 있는건지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나랑 남편은 이렇게까지 착한 사람들은 아닌데, 우리는 각자의 이기심과 욕망을 충족하면서 사느라 바쁘고, 양심적으로 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매우 이타적인 인간들도 아니다. 그냥 내 할 일 하면서 내 자신과 가족을 챙기는 정도만 해도 이미 충분하다. 그 이상 타인을 위해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 또 더 큰 세상인 지구 환경을 위해서 뭔가를 적극적으로 행동해본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규칙들은 지키며 살지만 동네 쓰레기를 직접 줍는다는 아주 작고도 실천하기 쉬운 발상은 대체 언제해본적이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도 어렸을 땐 이런 생각도 했었겠지.


아직 어린 아이지만 새삼 존경심까지 들기도 했다. 또래보다 발달이 좀 느린탓에 더 순수한 면도 눈에 띈다. 아마 같은 또래 초4아이들은 환경파괴에 대해 배웠어도 대다수는 굳이 이렇게까지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생님이 말한걸 곧이곧대로 듣고 그게 진실이고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그대로 해보고 싶어하는것이다.


흐뭇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왔다. 이렇게 순진한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온갖 기만과 눈속임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 대처할 수 있을지, 생각만해도 눈앞이 캄캄해져온다. 조금만 정신 못 차리면 어느새 사기를 당할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나도 제대로 모든걸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경계하면서 살려고 한다. 계산속없이 그냥 내 마음을 다 내어주기에는 세상은 만만치않다. 그러한 현실을 아이에게 일일이 가르치기에는 뭐랄까 너무 어렵기도 하고 직접 부딪히며 알아가는게 결국 진정한 배움일건데 그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일지 미리 걱정이 된다.


그래도 아이를 낳아서 키운덕분에 이렇게 쓰레기 줍기도 해보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내 경험치를 반강제로 넓혀주는 것 같아서 정말 어렵지만 색다른 인생공부다.


아이랑 둘이 동네 쓰레기 줍기를 한 그 늦가을날 아침은 오래도록 기억될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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