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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할아버지, 그거 다 사기야

진실을 마주한 아들

by 레이첼쌤

정상 발달의 보통의 8살, 초1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따로 1학년 아이들에게 일일이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직 순수한 마음으로 믿는 아이들도 있겠고, 어떤 경로로든 산타할아버지는 그저 환상일 뿐이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엄마, 아빠라는 걸 알게 된 아이들도 있을 것 같다.


내 아이는 몇 가지 자신이 꽂힌 분야는 깊게 파헤치는 바람에 지식이 해박한 편이지만, 언어발달지연으로 인해 사회성 저하가 온 탓에 또래 나이대에 습득해야 할 상황인지능력이 또래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다행히 IQ는 정상 범주라 한글 습득, 수학 개념과 같은 학습적 영역의 인지능력은 그런대로 평균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상황인지능력이"부족해서 사회성 발달과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관계 맺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인지능력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느낌으로 알고 분별하며 판단하는 능력을 일컫는데, 그중에서도 상황인지는 지금 내 주변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력을 가지고 상황을 이해한 다음 그에 맞게 행동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내 아이 같은 경우 그룹 수업에서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다가 누군가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서 다들 크게 웃는 상황이 됐을 때, 선생님께 정색하면서 왜 친구를 비웃냐고 웃으면 안 된다고 되려 화를 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에는 비웃은 게 아니고 귀엽게 봐줄 만한 정도의 실수여서 함께 가볍고 웃고 넘어가도 될 상황이었는데 내 아이는 그 상황의 인지가 어려워 정색하고 화를 냈고 선생님께서 이럴 땐 웃어도 된다고 설명해주니 되려 당황하면서 눈이 빨개지면서 울려고 했다. 이게 지금 웃어도 되는 건지, 웃지 않고 무안해하는 친구를 배려해야 하는 건지 일일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덜 발달되어서 아이는 상황에 맞지 않게 화를 낸다던지, 정색하면서 주변 친구들도 불편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인지능력은 내가 붙잡고 공부를 시켜서 알려줄 수도 없고 스스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면서 알아가야 하는데, 유아기 때 언어발달의 지연이 오면서 다양한 사회적 상황을 통해 경험하면서습득해야 할 시기를 놓치게 된 것이다.

참 안타까운 게, 아이 스스로도 그걸로 인해 만만찮은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는 사실이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지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본능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으면 스스로도 머리가 복잡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될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발달이 느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또래 아이보다 순수하다는 말을 의도치 않게 많이 듣게 된다. 장애진단을 받고 도움반에 입학할 정도가 아닌 adhd나 감각발달, 언어지연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서 경계에 있는 아이들은 보통 일반반으로 입학하기 때문에 겉으로 봤을 때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보통 애들과 있다 보면 또래 아이들보다 또래 문화를 습득하는 게 확실히 늦기 때문에 더 순수하고 순진한 매력 아닌 매력을 본의 아니게 갖게 되는 것이다.


보통의 초1 아이들은 말이 8살이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일삼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무리를 형성해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기도 하고, 유튜브나 티브이에서 유행하는 유행어나 비속어도 즐겨한다.


내 아이는 사회성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유머나 비속어에도 큰 관심이 없어서 나는 일부러 "어쩔티비"같은 말을 아이에게 사용하면서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유행어 몇 마디 한다고 갑자기 없던 사회성이 생기고, 친구 사귀는 능력이 생기는 건 물론 아니지만, 다른 친구들이 그런 말을 사용했을 때 재미없이 무반응으로 있는 것보단 웃거나 같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최소한의 공감이라도 해주는 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순수한 매력을 가진 이미지가 되어버린 아이라서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도 굳건히 믿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떼쓰고 고집부릴 때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산타할아버지가 다 보고 있다가 너 크리스마스 선물 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고,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올해 12월에도 어김없이 그런 전략으로 아이의 행동을 좀 통제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아이가 갑자기 물어보았다.



엄마, 산타할아버지 사기예요?


나는 적잖이 놀랐다. 아이의 입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사기"라는 말이 나오다니. 산타할아버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순 있지만 적어도 "산타할아버지 진짜 있어요? 없는 거 아니에요?"와 같은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 아이 입에서 사기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

"아니, 산타할아버지 계시는데? 진짜 멀리서 너가 착하게 살고 있는지 지켜보고 계셔."라고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이는 그런 나에게 반박했다.

"태권도장에서 어떤 형이 산타할아버지 그거 다 사기야 믿지 마!라고 엄청 크게 소리쳤어요."라고 말했다. 어떤 짓궂은 녀석이 동생들의 환상을 깨 주고자 태권도장에서 장난을 쳤나 보다. 아이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남이 하는 말, 특히 엄마인 내가 하는 말은 거의 곧이곧대로 듣고 믿는 편이라서 산타의 존재에도 별 의심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몇 번 더 산타할아버지 진짜 계신다고 말했지만 아이는 그거 사기인 것 같다고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동심이 깨진 것이 은근히 반가웠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동심을 가진 어린이로 자라 주는 것도 좋지만, 발달이 느린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장착하게 되는 순수함이라는 매력을 깨고 언젠가는 맞닿뜨리게 될 진실을 짓궂은 태권도장 형의 말을 통해 알게 됐다는 게 아이가 조금은 성장했다는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가 친구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속어를 한 번씩 쓸 때, 나에게 자신만의 논리를 펼치면서 대들 때, 친구들이 한다는 컴퓨터 게임을 듣고 와서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나의 우스꽝스러운 장난에 “재미없거든”이라고 정색하며 반응할 때, 보통의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초등학생 특유의 그 초딩스러움을 동반한 “싸가지없음”이 내 아이에게서 발견될 때 나는 놀랍기도 하면서 기쁘다. 물론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흐뭇한 마음이 더 큰 게 사실이다. 느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닌 것에 더 감사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그래서 이제 그냥 마음 편하게 아이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어떤 선물 받고 싶어?"라고.


어차피 선물은 산타할아버지가 아닌 엄마, 아빠가 사주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에 부담 없이 물어봐도 상관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느린 아이도 나름의 속도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 비록 크리스마스에 대한 아이의 환상은 깨졌을지라도 나는 사뭇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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