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2년의 나를 칭찬합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by 레이첼쌤

올해가 이제 정말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직장 생활할 때에는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나의 인생에 있어서 올해는 의미가 남다르다.

아이를 낳고 근 3여 년간의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한 후에 4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아이는 그렇게 7년간의 유아기를 마무리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 휴직을 하게 되었다.


올해의 휴직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조금 부족한 아이를 어떻게든 정상궤도로 끌어올려보자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무조건 올인할 것.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ADHD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것.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가 입학하게 된 집 앞 일반 공립초등학교에 적응시킬 것.

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 동네 엄마들과 친해질 것.. 등


1년의 휴직을 앞둔 나를 직장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휴직하면 아이 학교 보내놓고 쉴 수 있어서 좋겠다, 뭐 배우러 다닐 계획이냐, 필라테스해봐라, 캘리그래피 수업도 들어봐라."라고 하며 평일 오전에 브런치카페도 다니는 여유를 즐기라며 한시적이지만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축하해 주었다. 보통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반년에서 길면 일 년 정도 휴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대부분은 새로운 취미를 배우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분위기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사치였다.


아이를 위한 휴직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장하게 올해의 목표를 써 내려갔다. 물론 온전히 다 아이에 관한 것은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한 목표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내가 잘한 것은 무엇인지 또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반성 및 새로운 각오를 다짐을 다지는 글을 써보고자 한다.


첫 번째, 건강관리다.

나는 무조건 건강해야만 한다. 나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게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한 길이고, 아이를 잘 케어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수적이다. 기본 체력도 약한 편인데, 따로 즐기는 운동도 없어서 나는 근무하면서도 체력의 한계를 자주 느꼈다. 그나마 2년째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하고 있는 스트레칭이 전부였다.


휴직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아침 스트레칭 시간을 더 길게 잡아서 운동 효과가 있을 만큼 해보기로 했다. 이외의 다른 운동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4월쯤에 걷기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의외의 계기가 있었다. 계기를 제공해준 건 바로 남편. 실망시키고 상처를 줘서 대판 싸우고 아무 계획 없이 현관문을 나서버린 봄날의 밤에 나는 갈 데가 없어서 집 앞 천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아직은 쌀쌀하던 때였는데, 그냥 아무 목적 없이 걷기만 한 그 시간 동안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덜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더 좋아서 점점 더 멀리, 길게 걸었고 거의 한 시간가량 걷기 운동을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풀, 나무,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기분은 마음껏 중독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한여름에는 아침에도 덥고 눈부셔서 러닝머신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날이 선선해지면서 다시 야외 걷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1월경에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로는 따로 숨 가쁘게 달려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땀 흘리면서 달리기 운동을 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나도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근 두 달 동안 달리기의 매력에 빠져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30분 이상 달렸다. 초보 러너라 실력자들이 보면 아주 코웃음 칠법한 느린 속도긴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선물같이 느껴졌다.

왜 이제야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나 자신을 나무라며 이제라도 달리기를 평생의 내 습관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이게 무리가 됐는지, 아니면 아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인지 혈소판 부족으로 인한 혈관염 증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며칠 째 달리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 따위 아픈 것 정도는 참고 계속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증상이 심상치 않았다. 내 몸이 잠시 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그냥 내 몸과 타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내 몸이 주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조금 쉬었다 가기로 했다. 조금 우울하긴 하지만, 어차피 날이 너무 추워서 야외 달리기는 무리가 되니 차츰 날이 풀리고 몸도 좋아지면 꼭 다시 시작할 거다.


올해 내가 우연히 시작하게 된 걷기와 달리기가 체력을 향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해봤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두 번째, 독서와 글쓰기다.

올해 책을 60권 읽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번 주에 지금 읽고 있는 책까지 포함하니 나는 올해 총 75권의 책을 읽었다. 주로 발달 장애, ADHD, 자녀교육 분야에 집중해서 읽으려고 했는데 아쉬운 점은 한 번씩 이 분야와는 전혀 관계없는 재테크나 부동산, 자기 계발서도 읽었다는 것이다. 재테크도 공부할 필요성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지식이지만 나의 우선순위는 지금 그것이 아니다. 오로지 아이를 잘 키우는 게 목표인데 가끔씩 한 눈 팔고 말았다. 물질적으로 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남들은 다 혈안이 되어하는 부동산 공부나 SNS 성공법에 관한 책도 읽었다. 결과적으로 그 책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유익했으며 리프레쉬도 되었다. 그러나 내년에는 한 가지 분야만 집중적으로 파고들 생각이다.


또 한 가지 올해 내가 정말 잘한 일은 바로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년 전쯤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때는 아무 준비 없이 글 세 개 써놓고 브런치 작가가 아무나 다 되는 건 줄 알고(?) 신청했는데 거절당했다. 그 후로 브런치 앱을 받아놓기만 하고 거의 들어와 보지도 않고 블로그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브런치를 들어와 봤는데 올 해의 브런치북 프로젝트 홍보를 보게 되었고 그때 이거다 싶었다. 느린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나만의 경험과 상처들을 글로 기록해두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는데 왠지 블로그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 같았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상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원망, 절망, 후회와 같은 감정으로 버무려진 구구절절한 내 사연을 털어놓기에 블로그는 왠지 어색한 공간이었다.


SNS에 관한 책을 보면서 알게 됐는데 SNS도 각자 플랫폼 별로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어서 그 특징에 맞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 감정과 경험이 주를 이루는 에세이식의 글을 브런치가 딱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로 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단 두 편의 글로 하루 만에 브런치작가 심사에 통과했다. 그 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도 공모했지만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글을 구독해주는 독자님들도 백 명 이상 생겼고, 5편의 글을 쓰면 한 번쯤은 다음 메인에 올라가서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내 글이 이렇게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노출된 적은 처음인지라 너무 신기하고 설레었고 정말 작가가 된 것 같은 황홀한 기분도 들었다.


왠지 모를 의무감에 짧더라도 매일 글을 한 편씩 써서 발행했는데, 내년에는 좀 더 양질의 글로 다듬고 퇴고의 과정도 거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발행하고자 한다. 브런치 글쓰기 덕분에 우울함도 달랜 것 같고,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브런치가 앞으로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해줄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단 꾸준히 써 볼 생각이다.





셋째, 아이 키우기다.

브런치 프로필을 맨 처음에 작성할 때에 내 소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꽤 오래 고민했다. 나는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나는 나라는 사람 자체로 알려지고 싶었다. 일상에서도 매일 누구 어머니, 누구 엄마로 불려지는데 온라인 플랫폼에서조차 누군가의 엄마로만 있어야 하나 싶었다.


결국 나는 ADHD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내 소개글을 한 줄 쓰고 말았다. 이유인즉슨, 어차피 내 글은 지금 온통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아이에 대한 글이 주를 이루게 될 터이고 지금 직장생활을 하지도 않으니 나의 정체성을 가장 심플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결국 "조금 부족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가장 알맞은 거라고 결론 내렸다.


아이를 위한 목표도 여러 가지를 세웠다.

매일 동화책 두 권씩 같이 읽기.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등산 다니기. 과자, 유제품 최대한 안 먹이고 건강식으로 식단 챙겨주기. 친절하고 다정한 엄마 되기. 등등.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친절하고 다정한 엄마 되기"이다.

과연 나는 친절하고 다정한 엄마였는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해 줄까?


찬찬히 생각해보면 일을 했던 작년보다 올해에 아이랑 부딪히는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당연히 아이아 함께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양이 늘어나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아이가 약 복용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작용으로 감정조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작은 사소한 일에도 욱하고, 떼를 부리는 경우가 잦아져서일 수도 있다. 매일 아침 다이어리에 오늘은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 친절한 엄마 되기라고 쓰며 다짐했지만, 지키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았다. 불과 어젯밤에도 만화책 보면서 밥 먹다가 국을 식탁에 다 엎어버린 일, 피아노 학원 늦게 간다고 떼쓰는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고 말았다.


시시때때로 예고 없이 보여주는 아이의 감정 폭발에 나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이곳이 지금 직장이고, 아이는 고객이다. 호텔 뷔페에서는 아이가 밥 먹다가 국을 다 쏟아도 "괜찮습니다. 치워드리겠습니다."며 친절한 직원이 다 처리해주지 않는가. 물론 돈 한 푼 받는 직장은 아니지만 아이를 고객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직장인의 정신으로 무장해서 끝까지 참고 친절하게 대하는 게 현재 유일한 해결방안으로 느껴진다.






올해 가장 후회되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은 아이 앞에서 크게 부부싸움을 한 것이다. 세 번의 큰 싸움이 있었는데 나는 언성을 높이고, 울고불고하면서 남편을 원망하면서 죽고 싶다고,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외쳤다. 작년까지는 이렇게까지 크게 싸울 일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한 방에 일이 터진다고 결혼 9년 차에 참 크게 싸웠다. 나는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했고, 이혼 후에 삶을 어떻게 꾸릴지에 대해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외국으로 아이 데리고 떠나버릴까, 간다면 어디 나라로 갈까, 미국과 캐나다 중 비자받기 쉬운 나라는 어디일까 생각하며 정착할 도시까지 검색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자기 앞에서 크게 싸운 게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된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 번씩 "엄마, 아빠 좀 사랑해 줘."라는 말을 수시로 했고 내가 곁에 한시라도 없으면 불안증이 더 심해졌다. 평소에 아이를 위해 한 나의 노력들이 부부 싸움 몇 번의 노출로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센터 치료를 데리고 다니고,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아이의 정서를 위해 부부 사이를 좋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행복한 엄마, 아빠와 편안하나 가정 분위기에서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게 불안증과 강박증이 있는 내 아이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년에는 어찌 됐든 이 부분에 있어서 더 신경 쓰고 싸우더라도 최소한 "아이 앞에서 싸우는 일"은 없도록 각고의 노력을 할 계획이다.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의 나를 마구 칭찬하고 싶다. 완벽한 엄마, 아내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즉각 후회하고 반성하며 내일은 더 나아지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년의 목표를 조금씩 써 내려가고 있는데 사실 올 해와 크게 결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보내게 될 것 같다.


어찌 됐건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오는 지금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더불어 구독자님들도 모두 행복한 한 해가 되셨기를, 내년에는 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랄게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