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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Aug 20. 2021

어쩌다 남해살이 3

퇴사 후 남해 미조에 사는 친구집에 더부살이 하게 된 2주 간의 이야기





고구마가 내어준 아늑한 방에서 새벽까지 스탠드를 켜두고 프렌즈를 보는 시간은 남해살이 중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 없는 내겐 이런 순간이 간절했기 때문에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자막을 읽고 때로는 실소도 터뜨리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






시골에서는 느닷없이 크게 부르며 오라고 할 때 지체 없이 달려가야 한다. 조용한 집, 조용한 마을에서 사람을 불러 모을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열 중에 여덟은 분명, 먹을 것을 나누기 위함이다. 2층 방에 처박혀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언지야~~~!!!” (참고로 내 이름은 은지다) 하고 큰일이 난 것처럼 부르는데 무슨 일인가 하고 내려가면 늘 좋은 일이 있다. 꿉꿉한 날씨와 지독한 생리통에 약빨에 의존해 겨우 숨만 붙어 누워있던 때에도 꾸역꾸역 나가보니 부드럽게 삶은 수육이 기다리고 있다. 몸이 퉁퉁 부었어도 이 기가 막힌 안주에 술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받은 인삼더덕주. 이 상차림은 생리통이 올 때마다 생각날 것 같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생리통이 시작되면 수육과 인삼주가 생각나는 그런.






조용한 낮, 미조의 풍경. 멸치 어선이 멸치를 털어내는 날에는 구릿한 비린내가 나는 작고 조용한 항구. 밤에는 저 배에서 나오는 빛이 창문에 어스름하게 비쳐 보이는데 그 빛이 숙면에 방해가 될지는 몰라도 가끔은 무서웠던 새벽을 다독여주곤 했다.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는 유일한 고양이 녀석. 멸치를 코앞에 던지는데도 쏟아지는 잠 때문에 눈을 꿈뻑거리는 중. 이 고양이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고양이 가족 내보내기 작전 때 갑자기 토를 하기도 하고 쎅쎅- 숨도 이상하게 쉬고, 며칠 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밤에는 큰 고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덕구씨가 구해주기도 했다. 비를 맞고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해가 쨍쨍한 어느 날에 보송보송한 모습으로 평온하게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애들은 아프면서 큰다던데 너희도 그런 거니.






그늘 밑에 앉아 마당만 보고 있어도 되는 일상. 할머니가 되면 이런 순간이 무료하게 느껴질까? 해야 될 일이 없고 아무도 찾지 않으며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조차 궁금하지 않은 이런 순간들이 지금은 귀하기만 한데 말이지.





아버님과 어머님이 취미로 일구는 밭(이라기엔 규모가 상당하다). 감자와 고구마, 깨, 콩, 옥수수 등이 자라고 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고생스러운 일인데 여기서 자란 농작물들은 어디 내다 파는 것도 아니다. 일부는 동네 사람들이 오며 가며 뜯어가고, 일부는 수확해서 고구마네 식탁에 오르고, 대부분은 주변에 사는 일가친척 및 손님들에게 나눠준다. 이 밭에서 나온 농작물이 식탁에 오른 날에는 유독 아버님이 “이 무 봐라”, “억수로 맛있으”, “약 하나도 안친기다” 하시며 권하신다. 그럴 땐 무엇이든 잘 먹는 내가 정말 좋다.




이상하게 생긴 브로콜리. 생김새는 내가 아는 브로콜리와 다르지만 맛은 비슷하다.





이날도 저 멀리 섬이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K-후지산.







고구마네 밥상에는 늘 나물 무침과 김치, 생양파, 상추가 올라온다. 그 외 1-2가지 반찬은 로테이션되고 메인 메뉴로 찌개나 국을 올린다. 반찬을 깔끔하게 접시에 덜어 그날에만 먹는다. 집에서는 반찬을 늘 통째로 꺼내 놓고 먹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마음에 쏙 들었다. 채소를 좋아하는 내게는 초록이 가득한 밥상도 좋았다. 그중에도 제일 좋았던 찬은 생 적양파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물이다. 시금치와 비슷하지만 더 가늘고 부드러운 초록색 나물 무침이 늘 있었는데 그렇게 맛있게 먹었으면서 이름도 모르다니. 다시 먹으려면 남해에 다시 가야 할 판이다. 적양파는 아버님이 밭에서 직접 키운 작물인데 맵지 않고 달다. 식감이 무처럼 아삭하고 단단하며 즙이 많아서 진짜 맛있다. 이 밥상이 무려 아침상이다. 물론 눈도 못 뜨고 식탁에 앉았을지라도 내 앞에 주어진 음식은 절대 남기는 법이 없는 나는 늘 싹싹 비워 먹는다. 이날은 생멸치 튀김이 올라왔는데 아무도 손대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난 후 베트남 언니가 짜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는데 맛을 보지 않았지만 “괜찮아요. 맛있어요” 하고 대답하는 나.



고구마네 식사시간은 대체로 1시간 남짓. 보통 도시의 4인 가족이라면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지 않는데 이 가족은 TV가 없는 다이닝룸에서 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나는 방청객처럼 그 시간을 보내는데, 가끔은 가족들 생각이 났다.





베트남 언니가 만들어준 쌀국수는 인스턴트 제품인데도 서울에서 사 먹는 것보다 푸짐하다. 어떤 날은 숙주 대신 콩나물이 들어있기도 했다. 콩나물 쌀국수도 맛있다. 나도 집에서 해먹어야지.





내가 머무는 내내 아침마다 거의 김밥을 말아주신 언니. 다른 나라의 음식을 이렇게 잘 할 수가 있나.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다. 나중에는 아버님이 “또 김밥이가”, “니는 서울가믄 김밥 안묵긋다”, “남해갔드니 김밥만 쎄삐게 주드라 카믄서 욕하는거 아이가” 하셨다. 김밥만 계속 먹는 게 내심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진심으로 정말 맛있게 잘 먹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눈치를 보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거라 여기신 듯하다. 진심이었는데. 내 생각엔 올드보이도 군만두 말고 김밥 줬으면 복수 안 했을걸.





이 통통한 생선의 정체는 미꾸라지가 아니라 멸치다. 생멸치는 손가락만큼 굵고 크다. 남해살이 둘째 날 즈음이었던가. 고구마가 멸치 쌈밥집에 데려가 주어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녀는 내 앞에서 “멸치가 이기 뭐고. 다 뿌서져뿐다 아이가” 하며 맛도 없다고 투덜댔었다. 그녀에게는 이 통통한 멸치의 모습이 디폴트였던 것. 멸치를 통째로 건져 먹으면 뼈가 씹히긴 하지만 먹을만하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집에서 엄마가 꽁치 통조림과 묵은지를 넣어 조려주는 그 음식 맛이 났다. 생멸치는 비리지 않다.








낮잠 자는 사이에 감자를 잔뜩 수확해온 고구마씨. 메추리알 만한 알감자부터 주먹보다 큰 감자까지 크기가 다양한 감자에선 흙냄새가 났다. 그날 저녁엔 기름을 살짝 발라 구워낸 감자가 디저트로 올라왔다. 겉은 꾸덕하고 속은 부드러운 맛있는 감자 디저트.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텃밭에는 상추와 고추, 부추 등이 자라고 있다. 상추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보인다. 키도 커지고 잎도 풍성해졌길래 고구마에게 따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참에 따서 서울 우리 집에 보내자고 한다. 고추, 쑥갓, 부추, 호박잎까지 열심히 수확해서 챙겨주는 고구마씨.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고 잠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 말고 이쪽 따라”, “그렇게 따면 안 된다” 하며 그새 잔소리를 하는 야무진 친구. 똑 부러지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말이라 조금 한가해진 고구마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나갔지만 카페에 들어서기도 전에 급한 전화를 받고 가버린 그녀. 버려진 나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설리 스카이워크에서 제대로 된 풍경은 구경도 못하고 냉동창고 같은 카페 온도와 기다림에 지쳐버렸다. 내가 남해에 내려온 뒤로 흐리고 비 오는 날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덥지도 않은 날씨에 냉방을 얼마나 세게 하던지, 기댈 것이라곤 세상 마음 불편한 일회용 잔에 담긴 따뜻한 카푸치노뿐이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유일하게 소장용으로 매년 구매하는 책이라 맘 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다. 여행에는 역시 소설이 제격이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고구마가 다시 나타난 뒤에야 냉동창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빵을 먹고 싶어서 나온 길이었는데, 설리 스카이워크 카페에는 빵이 별로 없기도 했고 어지간히 춥다고 투정을 부린 나 때문에 그녀는 나를 다른 카페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나 빵은 없었다. (관광지라 비성수기에는 준비를 안 하는 듯하다) 빵 먹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시골은 시골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나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의 카페. 날이 좋을 때 다시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추위에 떨고 빵도 못 먹고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나를 위로해 준 것은 감자 포푸리였다. 포푸리 감자였나. 이것도 역시 고모님이 준비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거의 매일 맛있는 간식을 제공해 주셨던 고모님. 서울에서 왔다는 처녀가 감자를 푹푹 퍼먹으며 연신 “진짜 맛있다”고 호들갑을 떠니까 동네 아주머니가 신기하게 본다. “그리 마딧노?”, “이른 감자 첨 무거보나”, “진짜 잘묵네” 하는 장단에 맞춰 계속 먹었다. 따뜻하고 포슬포슬한 감자를 먹으니 슬슬 다가오던 몸살이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고구마네 부모님은 저녁을 드신 후 잠시 쉬거나 일을 마무리하시고 밤이 되면 주무시러 별장에 가신다. 그때가 고구마의 퇴근시간이다. 부모님이 나가시면 그제서야 밤바다에 나가고, 맥주도 마신다. 이날은 편의점에서 산 만두와 막창 그리고 내가 만든 김치전으로 야식을 먹었다.





그리고 안주가 부족했던 내 눈에 딱 들어온 호래기. 호래기는 서울에서도 겨울마다 즐겨먹는 나의 페이보릿 안주다. 주로 생으로 먹었는데 지금은 여름이라 살짝 데쳐먹었다. 이건 정말 먹어본 사람만 안다. 전에 갔던 벽련항 멸치 하는 고모님이 어망에 잡혀온 호래기를 따로 모아두었다가 주셨다는데 바다에서 잡힌지 얼마 안 된 싱싱한 놈들이라고 했다. 부모님도 드셔야 하니 딱 4마리만 데쳐 먹었는데 고구마는 내가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우린 맨날 묵는다. 니나 여 있을때 많이 묵고 가라”며 더 내주었다. 지금도 먹고 싶네.






역시 또 날씨가 얄궂다. 고구마와 어머님이 일이 있어 사천에 가는데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같이 나가자고 했다. 드라이브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따라나선 덕에 사천 케이블카도 구경했다.







그리곤 그릇가게에 들러 가정용/업소용 주방기구들을 실컷 구경했다.






나는 독서할 때 주로 올드팝이나 뉴에이지 추천 리스트를 재생하곤 한다. 책을 읽기 위해 영화 ost 팝송 리스트를 재생해놓았는데 추억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가사를 외우고 있는 노래, jessica의 Goodbye. 중학생 때 팝송 외워 부르기 같은 과제가 있었던 것 같다. 수백 번을 부르며 외운 가사가 각인됐는지 신기하게도 아직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부를 줄 아는 팝송이 한 곡이라도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외우기 위해 수없이 듣고 불렀던 그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자고 생각했다. 








날씨가 조금 개인 날에는 괜히 옥상에 나가서 책을 본다. 자연광 아래에서 자연풍을 맞으며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자유라는 건, 눈이 떠질 때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 하늘 아래 조용히 책을 읽다가 풍경을 보다가 하는 그런 게 아닐까.






멸치 똥 따주는 친구라니. ‘너 같은 남자가 있으면 꼭 사귀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있을까 싶지만. 이 센스 있는 친구는 어디서 배웠는지 아귀포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내주었다. 식감이 과자처럼 파삭파삭하고 고소하다. 마른 멸치는 고추장에 푹- 찍어 입안에 넣고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시면 궁합이 좋다. 달짝지근한 아귀포 한입, 짭짤한 멸치 한입. 야밤에 실컷 주워 먹고는 다음날 아침에 불어 터진 떡국 같은 얼굴이 되었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 아침부터 고모님이 읍에 갔다가 순대를 사 오시겠다고 예고를 하셨다. 나는 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기대를 안 했다. 하지만 이날 순대를 한참 집어먹고 ‘나 순대 좋아하네’ 인정하고 말았다. 아직 따뜻했던 그 온도 때문이었나. 특유의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지 않았다. 순대를 샀을 뿐인데 마늘 한주먹, 양파와 고추 한주먹, 쌈장에 깍두기까지 캐스팅이 화려하다. 이렇게 많은 구성 중에 소금이 없다니. 내가 소금 타령을 하고 있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나를 둘러싸고 “소금에 찍어 묵으면 비리서 몬먹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밤바다 진짜 예쁜데, 아이폰 X가 밤에는 일을 너무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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