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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Aug 21. 2021

어쩌다 남해살이 마지막

퇴사 후 남해 미조에 사는 친구집에 더부살이 하게 된 2주 간의 이야기


내가 내려가기 전만 해도 화창했다는 남해. 어쩐지 머무르는 내내 잔뜩 흐렸다. 남해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주말이 되어서야 화창한 날씨를 기념하며 나를 문명으로 데려간 고구마. 도착한 첫날부터 어디에 가고 싶냐고 연신 물어대는 통에 숙제하듯 찾아낸 몇 군데를 이야기했더니 별 볼일 없단다. 그럴줄 알았어. 어쨌거나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아서 미조를 떠나 남서쪽으로 무작정 향했다. 



앵강마켓은 귀촌을 한 어느 젊은 부부가 열었다는 특산물 매장이다. 웹진에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일본식 인테리어의 상점은 전체적으로 나무를 이용한 가구가 많았다. 고가구를 업사이클링 한듯한 앤티크 한 가구에는 남해의 특산물인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 건어물 등을 백화점 상품처럼 포장하여 진열해 놓았다. 특산품은 부피도 크고 양도 많고 거칠게 쓴 글씨로 큼지막하고 촌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의 제품들은 소량의 내용물을 심플하게 패키징 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상점이라 공간이 매우 협소하고 상품 수도 적어서 1-2분 정도 돌아보고 나왔다. 고구마는 '프리미엄은 무슨 프리미엄, 상품성 떨어지는 물건들 갖다 놓고 포장만 번지르르하면 다냐'며 잔뜩 분노했다. 







앵강마켓에서 몇 걸음 걷다 보면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가 있다. 유자 원액을 판매하는 카페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가오픈 둘째 날이라 음료를 무료로 제공해 준다고 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고 가족들에게 줄 선물로 원액을 두병 구입했다. 내가 좋아하는 진한 고동색의 나무로 만든 가구와 하얀 벽, 푸른 식물이 채워진 공간에서 잠시 서울을 느꼈다.






남해에서 가장 문명화된 곳이라 하면 단연 이스케이프와 아난티를 꼽을 것이다. 남해의 자연 경관과 호화 리조트의 풍경이 어우러진 곳이다. 아난티 내 서점인 '이터널저니'는 고구마가 리스트업 한 남해 일정 중 하나였다. 열흘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이곳에 오게 되다니. 나는 서점을 좋아해서 여행에 가서도 서점이 눈에 띄면 꼭 들어가서 둘러본다. 서점은 사람들이 최근에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경제나 사회의 흐름이 어떤지 베스트셀러 구역만 돌아도 알 수 있다. 평소에 내가 관심 없던 영역의 책에도 기웃댈 수 있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배려하는 분위기라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서점 앞 정성스럽게 꾸며진 정원은 평화로움의 극치다. 내가 집을 떠나 어딘가로 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데 너무 정갈해서 또 한편으로는 도리어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뭐든지 예쁜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게 좋다.






서점의 내부에 들어서서 감탄을 연발했다. 바다가 보이는 서점이라니. 나에게 이보다 호사스러운 일이 또 있나. 최근 서울의 서점들은 코로나로 인해 앉을 곳이 없다. 안락하고 예쁜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고 창밖엔 바다와 산이 보이는 이 공간은 사랑해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외식. 그것도 양식. 고구마는 날 데려가는 곳마다 자꾸 남자랑 왔던 곳이라고 한다. 최고 좋은 곳으로 데려왔다는 거겠지. 어쨌든 맛없으면 셰프 멱살이라도 잡을 만큼 비싼 파스타와 라자냐는 다행히 맛있었고 나는 모든 그릇을 싹싹 비워먹었다.





길가에 피어있던 꽃들. 저 뒤에 빨간 꽃은 양귀비 같다. 벌써 나이가 드는지 들꽃에 시선을 빼앗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이름이 뭘까, 누가 일부러 심어 놓았을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피어난 걸까 궁금하고 시기가 되면 알아서 피는 꽃을 해가 지나고 또 만날 때 반갑기도 하다. 올해는 돌아다닐 기회가 많아서 그런지 처음 보는 꽃인데 자꾸만 눈에 띄는 꽃도 생겼다. 관심이 생기니 안 보이던 것이 자꾸 보이는 건가.






에어컨 바람에 지쳐갈 때쯤 햇볕에 나와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를 즐겼다. 캠핑하기 딱 좋게 마련된 자리가 있어서 한참을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고구마는 데이트하러 갈 때 입을 코디를 참고하겠다며 지나가는 사람들 중 우리 또래의 처녀를 찾았지만 대부분은 아이가 있거나 어르신들이었다. 그마저도 수영복 차림이 많았다. 그 상황이 재밌어서 웃음이 났다.






남해는 육지 쪽에 산이 많아서 차가 다니는 도로가 주로 해안가에 나와있다. 목적지를 따라갈 때면 거의 해안 도로를 달린다. 차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바다였다가, 어떤 때는 마을이었다가하는데 모든 풍경이 예쁘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운동한지가 오래됐다고도.








집에 돌아오니 해 질 무렵이다. 밭에 부모님이 계셔서 일손을 보태러 갔다. 잡초를 뽑고, 밭고랑을 쳤다. 고랑 한 줄 치는데도 요령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소중히 먹어야겠다 다짐한다.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고 이런 노동에 '제대로 된 값어치가 매겨지고 있나'하는 의문과 함께. 도시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취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잊지 말자는 각오와 함께. 시골에 살아보니 살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참 많았다고 느낀다.






아버님이 키우신 우럭이 드디어 식탁에 올라온 날. 그간 아버님이 우럭 양식에 대한 철학을 상당히 내비치셨기 때문에 기대를 안 할 수 없었다. 나는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노을 구경을 했다. 뭘 도와드릴까 얼쩡거리니 어머님은 "손님은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하셨다. 아마 내가 고구마처럼 야무진 성격이라면 이렇게 입만 들고 있지는 않았겠지. 내가 이런 대접을 어디서 또 받을 수 있을까. 서울에 가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저 멀리 남해 작은 동네에 나의 또 다른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진짜 사랑이라는데, 집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났다. 술을 거의 드시지 않는 고구마의 부모님도 이날만큼은 건배도 한잔하셨다. 그 앞에서 나는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모두 나에게 양보하느라 다른 반찬만 드시는 것 같았지만, 내가 맛있게 먹어드리는 게 더 기쁜 일일 것이라 믿으며 마지막 한 점까지 다 먹었다. 






치어가 들어오는 날. 양식장에 따라갔다. 어머님의 비밀 아지트에서 발을 담그고 풍경에 취해 있는데 고구마는 자꾸만 빨리 가자고 한다. 이 작은 미조에서도 늘 바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도 여유를 부리지 못하는 일 중독자 같으니라고.





방파제 벽에 뭐가 잔뜩 붙어있는데 굴이라고 한다. 굴이 여름에도 있는 줄은 몰랐다. 맛있겠다고 하니 방파제 쪽에 있는 굴은 더러워서 절대 안 먹는다고 했다.







이 엄지손톱만 한 물살이가 치어다. 이날은 엄청난 양의 치어가 양식장으로 옮겨졌다. 물살이도 환경이 달라지면 스트레스를 받아 먹이를 먹지 않기도 한다. 먹히기 위해 키워지는 물살이라니. 물고기가 맞는 건가. 바다에 살아도 좁은 그물에 갇혀 헤엄치고 정해진 시간에 자동 급여기에서 나오는 사료를 먹는다.







바닷물과 가장 가까이 배를 타는 방법. 어렸을 때 롯데월드에 놀러 가서 적당히 무섭고 재밌어서 몇 번이고 탔던 신밧드의 모험 같다. 바다에서 배를 타면서 놀이기구를 생각하는 문명인.





초록색 박스가 자동 급여기. 통아래 프로펠러가 있어서 사방으로 사료가 뿌려진다. 사료가 나올 때 수면에서 뽁뽁뽁 하는 소리가 나는데 사료가 물에 빠지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물고기들이 사료를 먹는 소리라고 한다. 뽁뽁뽁뽁- 촤아아아-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길처럼 보이지만 바다에 떠있는 부표라 갯벌이나 물속을 걷는 것처럼 체력 소모가 많이 일어난다. 1차 산업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내내 실감했다. 장비를 사용한다고 해도 사람의 힘이 필요한 곳이 많다. 무거운 치어를 들통으로 옮기는 작업을 마치고 노동자분들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냄새난다며 오히려 미안해하는 사람들. 가는 내내 창문을 닫지 않은 것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이렇게 생긴 구름은 지진운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지진과 관계는 없는 것 같고. 스토리텔링이랄까. 네이밍에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다. 이름을 붙이면 역사가 생기고 가치가 부여된다. 어쩐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곱씹어 생각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눈치 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지만 지금쯤이면 서울로 돌아가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행 버스표를 사두고 마지막 일정은 다시 한번 금산에 오르기로. 남해에 내려온 직후 금산에 올랐을 때는 날이 좋지 않았으니 이번엔 분명 다른 풍경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아침 일찍 나선다. 등산로 입구에 검은 짐승이 떡하니 길을 막고 있기에 멧돼지인가 싶어서 겁을 먹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흑염소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숲으로 가는 흑염소. 그 걸음에 맞춰 시선을 따라가보니 흑염소 가족이 식사 중이다. 






금산은 정상까지 한 시간 조금 넘게 소요되는데, 숲이 울창하고 가팔라서 볼 것도 없고 숨이 죽을 것 같이 차오른다. 여기는 등산 후 처음으로 풍경이라 할만한 경치가 보이는 곳, 쌍홍문이다. 지방에 있는 산에 오르면 산이 겹겹이 펼쳐지면서 저마다의 선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서울에서는 도시를 산이 감싸고 있다면 지방에서는 산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 더욱 장관이다. 게다가 바다 너머 섬들까지.










지난번에 체력이 남아서 상사바위까지 갔더니 더 트인 경치를 볼 수 있었던 게 생각이 나서 보리암을 뒤로하고 상사바위에 먼저 갔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곳. 360도 빙글 돌면서 눈으로 찍는 파노라마. 새로운 곳에 가는 것과 좋았던 곳에 또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영화를 한 번 보면 감상이고, 여러 번 보면 취향이 되듯 단순 경험이 아닌 나의 일부가 된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멋지다. 좋아하는 것이 없거나,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불안정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유명한 금산산장에서 컵라면을 먹어볼 요량으로 슬쩍 가보니 자리가 없다. 너무 땡볕이기도 하고 역시 등산 중에 뭘 먹는 건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구경만 하고 보리암으로 향한다. 보리암으로 가는 길에 산에서 보기 힘든 차림의 모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래도 두 번째 온 곳이라고 그새 길눈이 밝아져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진짜 남해에 사는 서울 사람이 됐다.






금산 정상에서는 센스 있는 아주머니를 만나서 풍경 속에 있는 나를 찍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먼저 “사진 찍어 줄까요?” 하고 물어보시고 열정적으로 구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어주셨다. 찍어주신 사진을 확인 못하고 나도 동행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드렸다. 자리를 떠난 뒤에야 찍어주신 사진을 확인해보고 알아챈 사실. 아뿔싸! 내가 찍어 드린 사진은 풍경이 거의 안 나왔다. 돌을 밟고 올라서서 위태롭게 사진을 찍어주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인물사진은 젬병이라 친구들이 고개를 젓곤 하는데, 먼 곳에서 흔쾌히 친절을 베풀어주신 분께 기어이 실망을 안겨드리고 말았다. ‘대충’은 안된다. 어디서도.





무릎 보호대와 등산화 없이는 가파른 하산길이 도무지 걱정돼서 주차장으로 가 마을버스를 탔다. 알고 보니 코로나로 줄어든 관광객 때문에 수시 운행하지 않고 예약자만 타는 버스였다. 동창회에서 단체로 온 19명의 아주머니들 사이에 느닷없이 내가 껴서 기사님이 19명 전원 탑승으로 오해하고 버스가 출발했다. 한 명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눈치챈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 철저한 경계의 눈빛. 다행히 뒤에서 따라오던 낙오자분은 겨우 버스에 탈 수 있었고, 나는 연신 사과했고, 기사님은 물어보지도 않고 탔다고 나를 채근하고, 아주머니들은 이런 일도 다 있다고 웃었다. 



5분 정도 이동했을까. 다른 주차장에 다다르자 아주머니들은 우르르 내렸다. 고구마가 일을 하러 갔기 때문에 나 혼자 미조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인데 아주머니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 외에 주차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관광 안내소에 갔더니 심드렁한 아저씨가 버스를 타려면 한참 걸어내려 가야 한단다. 그런 나를 발견한 마을버스 기사님은 입구까지 태워다 줄 테니 타라고 소리쳤다. '어디로 팔려가는 건 아니겠지'. 약간의 걱정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기사님은 2.6km를 이 더위에 어떻게 걸어가려고 하느냐, 코로나 때문에 완전히 망했다, 어디까지 가느냐 등등 큰 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서 “여기서 오는 버스를 잡아 타라”고 말한 뒤 나를 내려주고 떠났다. 바로 이런 곳에.



앉을 곳도 그늘도 없는 차도 한복판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공포를 언제 느껴봤더라. 서울에서는 어딜 가든 지도 앱만 있으면 손바닥 안에서 시간과 동선을 최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서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 용기 있게 돌아다닐 수 있다. 고구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바쁜지 나중에 전화하겠다며 끊어버린다.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끄집어내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나타났다. 큰 버스를 택시 잡듯이 손을 흔들어 세우고 탔다. 노인 냄새가 가득한 버스에 올라타서도 승객들의 이목은 나에게로 집중된다. 완벽한 이방인이다. 고구마의 차를 타고 몇 번 왕복한 길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풍경을 감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걱정의 99%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더니. 앞서 걱정해봐야 몸으로 부딪히는 것보다 못하다.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해결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 카페에서 잠시 재충전을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혼자 있으니 고구마의 “뱃사람들 조심해라"라는 경고가 떠오른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트에서 컵라면과 막걸리를 사들고.






방에 라면 냄새가 날까 봐 옥상에 나왔는데 해가 너무 뜨겁다. 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후 3-4시쯤이었던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또 1층에서 “언지야!!!!!!!” 외치는 소리에 깬다. 남해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라 그런지 처음으로 고구마네 부모님과 덕구씨, 벽련항 고모부까지 총출동해서 외식을 했다. 메뉴는 장어구이.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메뉴이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 보는 크기의 장어다. 식당은 동네 주민들로 가득했다. 손님들이 서로 오며 가며 인사하면 진짜 맛집이지. 미조항 오륙도 횟집.





귀한 음식을 귀한 분들께 대접받고 아버님의 아이디어로 생겼다는 다리를 구경하러 갔다. 오후에 이장님이 다리에 조명을 밝히는 날이니 방송으로 저녁 먹고 산책 겸 나오시라고 방송하는 것을 들었다. 아직 방파제에서 직접 연결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정도는 됐다.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오픈한 거라는데 갈매기 똥 천지라 고구마가 또 잔뜩 성을 낸다. “이 갈매기 똥 드러버서 우짤꼬”








맛있는 저녁을 먹고 산책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으니 진짜 고구마네 가족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고구마는 동네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리 위가 온통 고구마의 이름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나도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는 지나가며 인사할 사람이 많았던 것 같은데, 6년 전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난 후로는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걱정될 뿐.









남해살이를 끝내기 며칠 전이었나. ‘휘영청 밝은 달’이 남해를 비추는 것을 봤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밝은 달이 수면을 비추는 모습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절대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경이로운 풍경이다. 은하수가 물에 떠있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은은한 달빛은 딱 내 눈에 보이는 만큼만 어스름하게 비춘다. 푸른 잎의 나무들은 까만 그림자 같고,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움직이는 빛은 보석처럼 빛난다. 그 순간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여서 위로가 됐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그 순간에 떠올랐다.


“좋아서. 나랑 친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


마지막 밤에는 밤마다 고구마와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와 밤바다, 밤하늘, 정갈한 밥상, 따뜻한 사람들, 조용한 방, 항구 냄새들을 다시 하나씩 곱씹으며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시 또 살아갈 용기를 낸다.






그리고 <디어 마이 프렌즈>.


남해를 떠나는 날에도 고구마는 바쁜 일정이 있어 일찍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삼천포에 일이 있어 가는 김에 삼천포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기로 하고 부모님이 잠시 외출하신 동안 도망자처럼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삼천포에 가는 동안 어머님과 아버님이 번갈아 전화를 하셔서 "은지 갔나?" 하고 물어보셨다. 그 전화가 전기장판처럼 딱 알맞게 마음을 덥혔다. 내가 먼저 전화를 드릴 걸. 늘 한발 늦는다. 어머님은 고구마에게 은지 용돈 주라고 하셨고, 아버님은 "시집갈 때 오니라" 하셨는데 그 말인즉슨 정치망에 시집가란 얘기다. 내내 정치망 멸치잡이 중에 젊은 친구 있다고 하시더니. 참 아버님스러운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고구마는 눈물 날 것 같다면서도 내가 탄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할 때까지 주욱 지켜보고 서 있었다. 다시 못 볼 것도 아닌데. 고마운 사람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다시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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