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중 대부분은 불가피하게 행해야 하는 일들이 차지한다. 하루의 1/3은 잠자면서 보내야 하고 나머지 2/3 시간 중에 절반은 자본과 맞바꾸어야 하고 그 절반 중 절반의 시간마저도 밥을 먹거나 몸을 단장하고 이동하는 시간으로 대부분을 보낸다. 따져보면 하루 중 스스로 욕구를 채우거나 해소하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2-3시간 남짓 밖에는 없다. 이 시간에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가지고 취미나 여가라고 한다.
내게는 몇 가지 취미가 있는데 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쓰는 편이다. 70%의 잡념과 20%의 자기합리화, 8%의 자기검열, 2%의 생산적 사유(글을 쓰기 위한)로 이루어진 나의 뇌가 쉴 시간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수면 중에도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한 달 중 여러 날에 걸쳐 느낀다. 예민한 탓인지, 강박증 탓인지 몰라도 어지간히 피곤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런 나의 취미 중에서도 유일하게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생산적 활동이 바로 산책이다.
산책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취하는 행위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선하다. 돈이 들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고, 시간이 없더라도 일상의 틈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산책을 통해 시간은 잊고 세월은 실감한다. 혼자든 둘이든 여럿이든 상관없이 어느 계절이든 어떤 날씨든 저마다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산책은 인간에게 완벽하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자율성을 부여한다. 단순히 걷는 행위가 '산책'이 되는 데는 목적지가 없다는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스스로 걷는 속도와 방향을 설정하고 가능한 시간에 원하는 시간만큼 자유로운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율성에 의한 일이라면 욕구불만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산책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인간에게 그토록 큰 힘을 주는 이유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 때문이다.
삶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많다. 사방이 꽉 막혀버린 절망의 미로 속에 있을 때는 두 발 언저리에 놓인 부정적 감정들을 주워 담기 쉽다. 부정적 감정은 자극이 강해서 한번 취하고 나면 더 큰 감정들을 계속해서 끌고 온다. 그렇게 감정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나면 감정에 절어 주저앉기 쉬운 중독의 상태가 된다. 지금의 상태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구제해 주지 않으면. 그러나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나를 구제해 줄 귀인이 없다. 나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워줄 일은 절대로 없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나밖에 없다. 상황이나 환경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는 쉽다. 시점과 관점을 바꾸고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된다. 그런 전환의 기회가 산책의 길에 널려있다. 갇혀 있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서는 것만으로도 나의 세계는 변화를 시작한다.
산책은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최적의 활동이다. 공기를 느끼고 숨을 들이쉬고 냄새를 맡고 걷는 속도에 따라 숨이 차고 다시 차분해지는 신체적 변화는 살아있음을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살갗에 닿는 차갑거나 축축하거나 끈적이거나 보송한 감촉을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절대로 느낄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에서 굉장한 자기 연민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아니면, 내가 아니면. 세상의 예리한 칼날이 나를 향하고 있을 때 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은 내 안에 있다고 믿는다.
산책을 하다 익숙한 계절의 냄새가 코 끝에 닿으면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다른 해의 이 계절은 어땠었나. 그 계절을 만끽했던 기억으로 한 걸음, 계절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며 또 한 걸음, 또다시 찾아온 이 계절은 어떻게 채워갈까 생각하며 또 한 걸음. 계절의 순환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관성적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상기시켜준다. 좋은 때와 나쁜 때는 곡선을 그리며 연속되고 늘 지금 같지만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인생이 좋은 계절일 때도 거만해지지 말고 좋지 않은 계절이라 해도 곧 좋은 계절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계절과 날씨의 냄새에 집중하면 세상을 느낄 수 있다. 땅 냄새, 흙냄새, 풀 냄새 같은 익숙한 자연의 냄새도 좋지만 도시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냄새가 있고, 요일의 냄새도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산책을 하면서 냄새에 집중하면 그런 생경한 이름을 가진 냄새들을 발견하게 된다. 익숙하지만 미처 집중해 본 적 없는 냄새에 이름을 붙이며 다니는 산책은 정말 재밌다.
고독은 혼자 있을 때보다 무리 지은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군중 속으로 파고들수록 철저한 무관심과 완벽한 타인으로서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 가끔은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 목적 없이 서성인다. 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곳에 목적 없이 가보자. 바쁘게 뭔가를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의미 없이 떠도는 부랑자가 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런 관찰은 새로운 생각을 불어 넣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까이 있을 때 보다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타인을 통해 나를 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저들과 다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인생을 잘 살고 싶다는 욕심에 너무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들이 나를 채운다.
장소가 아니면 시간을 달리해봐도 좋다. 등교와 출근으로 바쁜 아침에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물결처럼 흐르는 사람들을 거슬러 반대로 걷는다. 퇴사 후 출근을 하지 않으면서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는 시간이다.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으면 묘한 쾌감마저 든다. 그들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이 분명히 다름을 깨닫고, 남과 다르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사는 게 꿈이었던 내가 비로소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데에는 사람들과 내 인생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산책의 영향이 적지 않다.
혼자 하는 산책이 내적 풍요라면 함께 하는 산책은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만드는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는 재미가 있다. 한자리에 앉아서 하는 대화와 산책하며 하는 대화는 전혀 다르다. 마주 보고 이야기할 때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때는 설명되지 않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상대가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기민하게 관찰할 필요가 없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방향으로 걷는 그 사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생긴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을 긴밀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렇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이야기의 주제가 있으니 대화가 끊기지 않고, 속도를 맞추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데서 느끼는 따스함이란. 침묵 속에 베푸는 상냥한 친절만큼 귀한 것도 없다. 그런 귀한 마음을 받으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나는 산책을 사랑한다.
내 인생을 사랑하는 것만큼 산책을 사랑한다.
지금 절망 속에 있다면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산책하자.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면
당장 말해보자.
산책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