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김상욱 교수
관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한다.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것도, 수학이나 과학이 어려운 것도, 뭐든 쉬운 일은 없다는 것도 모두 관계 때문인 것 같다. 무 자르듯 쉽게 자르거나 나누면 좋을 텐데 삶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평등, 죽음조차도 때로는 불평등하다. 삶으로부터 시작된 불평등이 죽음에 이르러 절정을 맞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인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방향이나 깊이가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불가피하게 자주 시간을 보내지만 나에 대해 썩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은 ~한 사람이군요"라고 하면 그게 좋은 뜻이면 칭찬으로 받고, 좋지 않은 뜻이면 무시하면 끝이다. 그런데 같은 말을 가족이나 연인이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꼭 "넌 늘 그렇더라" , "넌 꼭 그런 식이더라", "넌 참 ~한 사람이야" 하고 '지속성'이라든지 지금 이 상황과 약간의 관련이 있는 다른 상황에서의 이야기가 따라온다. 혹은 똑같은 말로 "넌 ~한 사람이구나" 하더라도 일단 "그게 무슨 뜻이야?" 하고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일반화를 하려는 마음은 없다. 철저히 나의 입장일 뿐) 이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나에게서 나온 결론은 '관계'다.
관계는 곧 프레임이다.
내게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고 편견이 생긴다. 관계는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곧 프레임이다. 그림이나 사진에는 제한된 영역이 있다. 같은 그림(사진)이라도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인간에게 '관계'라는 성질이 부여되면 그 관계의 특성에 따라 인간이 부분적으로 도려내지는 것이다. 한 사람 자체로서는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 불완전해진다. 그것을 '역할'이라 볼 수도 있다.
특히 가족에게 그렇다.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무수한 경로로 '부모'에 대한 정의, '자식'에 대한 정의를 학습한다. 미디어를 통해, 교육을 통해, 그리고 경험 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본능이 아무리 자기가 알고 있거나 원하는 방향의 정보를 습득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가랑비에 옷 젖듯 무의식에 각인되는 반복적인 이미지는 막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부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주로 '희생', '헌신', '사랑'이다. 자식을 우선으로 하고 자신의 삶은 미처 돌보지 못하며 어느 한 곳 성한 곳도 없다. 그런 이미지가 내 자아 저 뒤편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부모'니까 당연히 해줄 수 있지. 좋은 부모는 이래야지. 하는 오만한 프레임이 생긴다.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깎아내며 번민했지만 승리의 깃발은 늘 부정적인 쪽에 꽂히고 만다. 이 선택에 수반되는 죄책감은 덤이다.
언뜻 보면 산수처럼 정확한 답이 있는 것 같지만 관계라는 변수가 개입되면 옳고 그름이나 하나의 선택을 하는 것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된다. 아이들이 볼 때 어른들이 쉽게 흔들리고 별것 아닌 일로 혼란스러운 이유도 아이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보면 글로 정리하기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광범위하고 복잡해서 미뤄왔던 주제였는데,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에서 멋진 두 사람이 정리를 해주어서 마음에 깊이 새기고자 글을 쓴다.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나와 연결된 어떤 매체 혹은 사람에게서 그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든지 더 깊이 빠지게 된다든지 혹은 답을 얻기도 한다. 언제나 나와 연결된 것들을 정원수처럼 잘 다듬어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그램은 최고 애정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나의 40대가 이렇게 멋지다면, 나이 드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김이나가 그 애정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코너에서 다루는 주제나 내용도 선하고 따뜻해서 각박한 세상 살아가는데 굉장한 힘을 준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 글쎄, 물리학 아카데미 코너를 신설했다. 물리학 김상욱 교수와 김이나의 대화 속에서 그간 머릿속을 어지럽힌 '관계'에 대한 상념들이 봄맞이 대청소처럼 시원하게 정리됐다.
물리학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운동'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텅 빈 무한한 공간에 물체가 단 하나 존재한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곧 나의 존재를 지각할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고독이 필연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늘 혼자라고 하지만 완전한 혼자일 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다른 존재와 함께이기에 외롭고, 고독하다. 수학적/과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는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존재할 뿐. 인간은 그러한 우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다. 단순히 태양빛이 산란하는 현상일 뿐인 노을에도 인간은 수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삶에 비유하며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정의로울까요?"
생물학의 토대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 제대로 자연을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환경에 대해 범해 온 무례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게 일방적인 관계였다. 인간관계가 일방적이면 안 되듯 더 섬세하게 자연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회복해나가야 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환경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전체는 각 부분의 합 그 이상이다. 부분과 부분이 만나면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든다. 그것은 관계로부터 생성되는 +a인 것이다. 원자 중 나트륨은 물과 만나면 폭발한다.(우리가 먹는 그 나트륨이 순수 원소일 때 그렇다고 한다) 나트륨 자체는 아무 작용을 하지 않지만 물과 만났을 때 힘을 만들어 낸다. 또, 나트륨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 에너지가 된다. 두뇌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나트륨이다.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더라도 무엇과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갈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나의 삶이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세계일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삶에 어떤 사람이 연결되는 것은 나의 우주에 또 하나의 천체가 생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나의 우주가 또 다른 법칙과 규율로 변하며 움직인다. 인간은 절대 혼자서 성장할 수 없다. 혼자서는 나아갈 수 없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이미 혼자가 아닌 것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가장 완벽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불완전한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관계'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할 수 없다면, 내가 애쓰는 일 중에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고 내려놓아야지. 그리고 나와 연결된 세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것인가 고민해야지. 완전하고 싶다는 불가능한 욕심보다는 아름다운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야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인간답게 해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