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많은 두 인물의 소통과 위로. 사랑.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셋이 나온다. '앙토냉 아르토', '반 고흐', 그리고 둘의 정신과 담당의(이지만 동일 배우). 작품의 시작은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아르토'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자신의 담당의와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일방적인 소통을 한다. 둘은 분명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경청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아르토'는 꿈 속인지, 환각인지 그 안에서 오래전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고흐'를 만난다. 둘은 그 누구도 이해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각자의 세계를 각자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아르토'는 연극으로, '고흐'는 그림으로. 둘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상대방의 상처를 위로해 주고 치유해 준다. 환상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아르토'는 '고흐'가 생을 마감했던 마지막 장면을 재현하며 그 또한 생을 마감하며 이 극은 막을 내린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 관람했을 때는 물음표가 많이 떠다니던 작품이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두 천재. '앙토냉 아르토'와 '빈센트 반 고흐'. 이 둘의 대화를 듣는 것은 참 난해하게 다가왔다. 문장의 대부분이 비유로 덮여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겹쳐 물리는 부분도 상당했으며 자신만의 언어들을 토해낼 때 꽤나 격앙된 목소리들이었기에. 그렇기에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 문제였고 우선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것조차 사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극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나를 울음 짓게 했다.
이 작품이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어떤 반응을, 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를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상처가 많은 두 사람이. 삶의 결핍과 날이 선 시간에 서 있는 두 인물이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상이라 자칭하는 자들과 그 세상으로부터는 존중도 이해도 받지 못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똑바로 마주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시간과 세상들을.
내가 이 공연을 보며 느낀 것은, 이해하지 않아도. 그러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아르토'와 '고흐'는 마주 보는 그 순간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 또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했다.
나도 잠깐이지만 그들의 시간을, 그들의 세상을 사랑했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사랑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중, 인정, 그 외 다른 것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사랑은 아무래도,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