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 수 있는 것

포지티브 규제와 네거티브 규제, 그리고 종교

by 민트형님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다양한 정책과 규범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규제라는 울타리 덕분에 자유와 권리가 의미를 갖는다. 심지어 민주화 사회의 규제는 억압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든 ‘질서의 합의’라는 점에서 한층 더 값지다. 우리 사회는 1세기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왕과 식민제국, 독재자를 넘어 국민이 법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 그 과실만 온전히 누린 MZ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두서없이 법과 규제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꺼낸 이유는, 최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법을 만들고 따르듯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여러 규칙을 세우며 살아가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철학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을 규율하는 정책의 기조를 잡는다. 각자의 생활 습관, 루틴, 말투, 버릇에 이러한 기조가 녹아들어 가 있으며, 우리가 내리는 의사결정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내 이목을 잡은 개념이 있다. 바로 ‘포지티브 규제’와 ‘네거티브 규제’다.



쉽게 풀어보면,


1) 포지티브 규제는 “하라는 것만 하라”는 접근이다. 예를 들어 공유 전동킥보드에 적용하면, ‘주차가 허용된 곳(예: PM 전용 주차구역)’에만 주차할 수 있다. 명료한 만큼 혼선의 여지는 적지만,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기는 어렵다.


2) 네거티브 규제는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접근이다. 같은 예시에서라면, ‘주차 금지 구역(횡단보도, 교통섬 등)’만 피하면 어디든 주차할 수 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융통성이 높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께 묻고 싶다.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나는 후자에 가깝다.


이렇다 할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신을 쉽사리 갖지 못하는 편이기에, 내가 싫어하거나, 틀리다고 생각한 것들만 안 해도 평타는 치겠다 싶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일에 쉽게 왈가왈부하지 않으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융통성 있게 지낸다.


틀림의 경계는 분명 하나, 맞음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은 나다.


이런 나에 비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A는 포지티브 규제를 택했다. 한때 꽤나 자유분방했던 A는 별안간 갑자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담배도, 술도, 이성도 끊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도박과 유흥처럼 나쁜 길로 샌 것도 아니고, 사이비에 빠진 것 같지도 않았기에 친구로서 그의 변화를 존중했다. 이제 그의 거의 모든 행위는 기독교 교리에 근거한다. ‘말씀대로 살면 된다’는, 명료하고 확신에 찬 포지티브 규제의 삶인 셈이다. A와 만나면 우리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수많은 선택지 중 오답을 피하는 나와 달리,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는 A가 답답하기도 했다가, 또 확신에 가득 찬 A의 눈동자를 볼 때면 그가 이따금씩 부러웠다.


나도 교회를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며 성인이 되고 나서도 또래들보다 평균 이상으로 신앙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님으로써 음주와 같은 생활양식(나는 반주를 좋아한다.)과 수많은 일요일을 희생해야 하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더욱 엄두가 안 났다. 그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했었고, 나 또한 그 실망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살았다.


그러던 와중, A에게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A는 나라면 차마 견디지 못할 비극을 놀라우리만치 의연하고 의젓하게 견뎠다. 삶이 가져다준 큰 비극을 신앙으로 버티는 A를 보며 종교의 순기능을 실감했다. 평소에 답답하리만치 절제하고 희생하면서 쌓아온 신앙이, 그의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에 빛을 발한 듯했다. A는 헤어 나오기 힘든 슬픔 속에서도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아는 듯 보였다. 아직 그의 방식대로 그 과정을 온전히 감내하는 중인 듯하다.


평범한 일상의 애매함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적당히 하지 말 것을 안 해도 중간은 간다. 하지만 삶의 비극이 덮치는 그 순간에, 수많은 선택지 중 오답을 피하는 것보다 확신을 가지고 붙드는 것이 더 나은 처사일 수 있다.


그렇다고 포지티브 규제가 네거티브 규제보다 항상 낫다는 것은 아니다. 그 기조나 사이비가 나와 주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아무 기조를 갖지 안 하느니만 못한 것 아닌가.


나와 내 주변에게 건강한 옳은 기준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많은 규제를 감당하고 사는 것은 무척 어렵고,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이런 불편함은 평소에는 짐스럽지만 어려운 때에 빛을 발한다. 내가 말하는 불편함이란 것도, 기준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더 이상 불편함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차원적인 불편을 넘어 더 큰 가치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분간 각박해졌으면 더 각박해졌지, 결코 쉬워지지 않을 심산으로 보이고, A가 겪은 일은 어찌 보면 나에게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 거센 파고를 나는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가꾼 체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지금은 삶에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A처럼 종교를 받아들이긴 힘들겠지만 내가 겪을 경험과 고민이 언젠가 그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을 갖게 해 줄 대안으로 이끌 수 있길 기대한다. 모종의 경험을 통해 어쩌면 나도 A처럼 될 수도 있겠지.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그리고 어색하게, A가 건강하게 추스를 수 있기를, 신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돌고 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