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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버린 입

엄마의 9월 첫 번째 토요일

by 김수다

베트남 여행과 시부모님과 함께 한 일주일의 여운은 느끼하고 더부룩했다. 지난 목요일부터 갑작스럽게 왕성해진 식욕이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싯적엔 앉은자리에서 피자 한 판, 치킨 한 마리도 거뜬했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거나 과식이라도 하면 복부팽만감과 복통으로 며칠씩 고생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식단 관리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는 의지도 강한 편인 데다가 건강한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식단 관리가 어렵지 않았다. 케이크나 크림빵보다도 딱딱하고 메마른 빵을 좋아하고, 소스나 드레싱 없어도 잘 먹었다. 가끔 주말이나 특별한 날에는 메뉴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술도 마시지만 식사량이 적어 속이 불편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호르몬의 영향을 받을 시기도 아닌데 자꾸만 과자가 생각나고, 정신 차려보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고, 나도 모르게 배달어플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아직 아침이니까 든든하게 먹어도 되겠다는 핑계로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었다. 그리고 할로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근처 도넛가게에 왔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학원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가려고 했지만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앞 도넛 가게에 온 것이다.


도넛가게에서 커피만 주문하려고 했지만 커피와 도넛을 함께 시키면 좀 더 할인이 되는 세트 메뉴가 눈에 보이자 나도 모르게 그 버튼을 눌렀다. 사실 이건 돈을 아낀 게 아니라 안 먹어도 되는 도넛에 돈을 쓴 셈이지만 그런 깨달음은 어쩐지 늘 늦는다.


표면에 초코코팅이 되어 있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초코도넛이었다. 한입 가득 넣고 우물거린다. 적당한 기름으로 촉촉한 빵이 고소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까지 더해지니 도파민이 터진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또다시 도넛을 한입 깨문다. 풍성한 초코크림이 흘러나온다. 초코가 폭발하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도넛을 타고 내려온다. 초코크림이 손에 묻을세라 빨리 입으로 가져가 앙 하고 베어문다.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도넛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거였으면 좋겠는데. 몇 입 안 먹은 것 같은데 벌써 사라졌다. 어디 갔니, 내 도넛.


자꾸 왜 이럴까. 그만 먹어야 하는데, 안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배가 부르고 속이 더부룩한데도 자꾸만 먹는 걸 찾고 있다

왜 이리 먹고 싶은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는지 내 마음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걸 참기 어렵다고 속상해하던 외래 환자들 얼굴도 떠오른다.


‘허기짐‘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다.

1. 포만감은 느끼지 못하는 배고픈 뇌 hungry brain,

2. 위장관의 배출속도가 빨라 생기는 배고픈 위장관 hungry gut,

3. 쾌락과 보상을 위해 찾는 감정적 허기 emotional hunger.


나는 배가 부른 것을 느끼다 못해 불편해했다. 요 며칠 많이 먹어서 실제로 배고픔을 느낀 때는 거의 없었다. 나의 허기짐은 배고픈 뇌나 배고픈 위장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감정적인 문제일까. 아니, 대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걸까.


시부모님과 여행부터 함께 했던 열흘이 힘들었던 것일까. 새 학기가 시작된 할로 때문인 걸까. 일하는 게 나도 모르게 힘들었었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직 할로 학원 끝나려면 40분이나 남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먹어? 하나 더 먹어? 다른 걸로 더 먹어?


오늘 할로아빠가 퇴근하면 강화도에 가서 꽃게찜을 먹기로 했다. 저녁도 과식 예정인데 도넛은 여기서 그만두는 게 낫겠지. 아 모르겠다, 괜히 얼굴을 벅벅 긁어본다.

손에 끈적한 뭔가가 묻었다. 자세히 보니 초코크림이다. 아까 도넛을 먹을 때 입 주면에 잔뜩 묻히고 먹었나 보다. 급하게 거울을 찾지만 애초에 거울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휴대폰 카메라를 열고 셀카모드로 바꾼다. 내 얼굴이 보인다. 못생긴 얼굴, 도넛같이 생겼다. 참 지저분하게도 묻히고도 먹었다. 이 꼴을 하고 뻣뻣하게 앉아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니.


터져버린 입에 갑자기 자괴감이 들지만 뭐, 별거 있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이런 게 엄마의 토요일이지. 다이어트는 원래 월요일부터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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