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9월 두 번째 토요일
“엄마, 입에서 피맛이 나.”
몇 달 전부터 흔들거리던 할로의 이, 드디어 때가 되었나 보다. 벌써 6개나 빠지고 이번이 7번째이지만 한 번도 예상이 맞은 적이 없었다. 보름은 지나야 빠질 거라고, 불편해하는 아이를 달래주었는데 피까지 나는 걸 보니 오늘이 날인 듯했다. 꽤 많이 흔들려서 손가락만 까딱해도 빠질 것 같았지만 과잉치라 치과에서 발치하고 상담을 받는 게 나을 듯했다.
다니는 치과가 학원 근처라 학원 가기 전에 빨리 다녀오자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진료 시작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환자들이 가득했고, 오늘 예약 환자가 많아 원장님 진료는 어렵고, 부원장님 진료만 가능하다고 했다.
“엄마 나 누구한테 진료받아? 그때 그 ‘안 흔들려요. 어머니! 안 흔들린다니까요!’ 그 선생님한테는 안 하고 싶어. 너무 안 친절해. “
할로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를 향해 소곤거렸다.
작년 가을부터 흔들거렸던 할로의 윗 앞니는 반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였고, 할로가 많이 불편해하길래 올봄에 다니던 치과에 데려갔다. 친절하고 자상한 원장님이 좋아서 다니는 치과였는데 그날은 원장님이 휴진이라 부원장님 진료를 봐야 했다. 아이의 이를 한번 만져본 부원장님이 나를 바라보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이거 안 흔들리는 거예요! 안 흔들린다고요! 이거 빠지려면 반년도 더 남았어요! “
한 순간에 자기 자식 이 흔들리는 것도 제대로 확인 못하는 모자란 엄마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핀잔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눈물까지 핑 돌았다. 아이가 앞에 있었기에 그런가요, 하고 급하게 병원에서 나와 버렸다. 할로도 꽤나 민망했었는지 그날 저녁 아빠에게 오늘 치과 선생님이 친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병원은 그리 반가운 곳은 아니다. 아파서 가는 곳이니까. 통증으로 불편한 데다가 치료가 아프지는 않을지, 큰 병은 아닐지 누구에게라도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순간을 친절한 의사와 함께 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고, 어린아이라도 친절하지 않은 대우를 받았을 때는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아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한다.
산부인과 특성상 환자들은 아프도 불편해도 긴 시간을 참고 고민만 하다가 내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마저도 의사 앞에서 속 시원히 얘기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특히 의사가 남자면 더 어렵다.
“이렇게 금방 나을 걸 진작 올걸 그랬어요”
“산부인과는 왠지 오기가 너무 힘들어요. “
“그래도 선생님이 여자라서 다행이에요. “
환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들이다.
“이거는 심한 것도 아니죠.”
“뭘 이런 걸로 아프다고 하세요.”
“아파도 좀 참으세요.”
이런 말을 쉽게 내뱉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 부원장님은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할로는 씩씩하게 이를 뽑았다. 엉엉 울 거라고 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나 빨리 집에 가서 놀자고 한다. 어린아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용감하게 이를 뽑는 것을 이겨낸 데에는 의사 선생님의 친절함 덕분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가. 나의 장래희망은 무엇인가. 나는 다정한 의사가 되고 싶다.
친절함이 무릇 당연히 나를 찾아온 환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태도라면 의사로서의 다정함은 환자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그 마음도 헤아릴 수 있는 따뜻한 공감이다. 나를 찾아와 아픈 이야기하는 당신에게, 나에게 털어놓는 것으로 마음만이라도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란다는 기도인 것이다.
토요일, 이번 주 만났던 환자들을 떠올려본다. 일부러 나를 찾아왔을 수도 있고, 어쩌다 보니 나를 만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아픈 것만 잘 치료해 주면 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경계를 잘 지켜야 한다, 의사도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일 뿐이다, 이런 말들도 일리는 있고, 나의 마음을 가엾고 애처롭게 생각하는 동료들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
언젠가 진료실에서 선생님은 손이 참 부드러우시네요,라고 말해주셨던 환자분이 계셨다. 실제로 내 손은 몹시 차갑고 거칠지만 그 환자분은 내 진심을 느끼셨던 것이다. 손과 눈빛과 말투에도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매일 만나는 환자들을 통해 배우며 산다.
나의 장래희망은 다정한 의사, 내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꿈을 이룰 수 있게 나를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