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9월 세 번째 토요일
오늘 할로 뮤지컬 학원이 끝나면 병원에 가야 했다. 할로의 검진 때문인데, 친구가 하는 병원이라 가끔 들를 때마다 가벼운 간식거리를 들고 간다. 친구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은 단순한데 뭘 사가야 할까 하는 고민은 복잡하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부담스럽지 않아야 하고 바쁜 와중에도 간단하게 직원들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센스 있는 메뉴를 선택해야 하니까. 오늘은 우리 동네 내가 애정하는 휘낭시에 전문점에서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꾀죄죄한 전공의 워킹맘 시절, 출퇴근길 유독 눈에 띄는 매장이 있었다. 모노톤의 심플함도 아기자기한 귀여움도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원목가구와 우아한 패턴의 바닥타일, 앤틱한 분위기의 작은 그림과 액자들. 생소한 ‘에스프레소바’ 간판. 자고로 카페란 푹신푹신한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 오랜 시간 커피 한잔으로 죽치고 있는 곳이 아니었던가. 왜 굳이 서서 커피를 마셔야 하나 의아했던 곳.
지치고 고된 하루,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억울할 것 같아 퇴근길에 용기를 내 들러보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플레인 휘낭시에를 하나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이탈리아 베네치아 어느 골목길에서 봤던 그 어떤 카페가 떠올랐다. 와, 휘낭시에가 이런 거였구나. 처음 먹었던 이곳의 휘낭시에는, 휘낭시에-라는 단어를 되뇌일때마다 입 속에서 살아난다.
이 날 이후로 가벼운 선물이 필요할 때면 이곳에서 휘낭시에를 선물하곤 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나 맛있는 게 먹고 싶을 때에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누군가 동네 맛집이 어디냐 물을 때면 이곳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오늘 토요일, 친구의 선물을 핑계 삼아 이곳에 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며칠 전 미리 선물포장 주문을 해두었고, 할로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주문 픽업하러 간 김에 휘낭시에와 커피를 먹겠노라 계획을 철저히 세워두었다. 어찌나 설레던지. 이게 뭐 별일이라고. 동네 카페 가는 일에도 계획을 세우고 기대하는 주책맞은 아줌마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참 변함이 없다. 묵직한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면 고소하고 부드러운 버터향기가 나를 맞아준다. 들어가자마자 카운터가 보이고 오른쪽엔 카드단말기와 메뉴판이 있다. 늘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지만 ‘에스프레소바’라는 명칭에 걸맞은 다양한 커피 메뉴들이 반갑다. 검정옷을 입은 직원 뒤로는 커피머신들이 유난히 반짝인다. 쇼케이스에는 휘낭시에와 스콘, 쿠기가 나란히 누워있다. 플레인, 무화과, 초코, 아몬드가 들어 있는 것부터 계절 따라 밤이 들어간 것까지, 나란히 나란히. 전에는 못 보던 시나몬롤스콘이 있어 휘낭시에 하나와 함께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고 핑크색 테투리와 금박장식이 조화로운 접시 위에 스콘과 휘낭시에가 올려져 나왔다. 접시를 들어 바닥을 본다. 예쁜 접시를 보면 나도 모르게 접시 뒷면의 브랜드 이름을 확인한다.
유광골드의 포크와 나이프를 각각 손에 쥐고 휘낭시에부터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잘린 단면이 살짝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린다.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가득 느껴본다. 짙은 갈색만큼 단단한 표면은 바삭하고 끈적인다. 바삭함이 지나가면 포슬포슬함이 느껴진다. 뭉개져 혀를 감싸면 촉촉해지면서 부드러워진다. 오물오물 씹는 동안 풍미가 더해진다. 이렇게 먹는 건 먹는 게 아니야, 하는 생각에 두 손가락으로 휘낭시에를 번쩍 들어 올려 앙, 하고 한입 크게 베어문다.
아, 맛있다. 여전히 맛있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스콘과 커피까지 다 먹었지만 나의 허기와 마음이 아직 채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할로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다 되기도 했고 몇 개 더 먹는 것이 왠지 좀 부끄러워 몇 개는 내 몫으로 포장을 했다.
내가 이곳을 애정하는 이유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한결같이 맛있다.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 50분, 1시간 50분의 시간을 ‘브런치북 <엄마의 토요일>’에 담고 있다. 6개월의 시간 동안 나의 토요일은 매번 달랐다. 늘 가은 시간이 어쩜 이렇게 다를까. 매주 다른 일정과 다른 생각으로 채워졌던 <엄마의 토요일>을 훑고 있노라니, 오늘 늘 한결같은 휘낭시에의 존재가 큰 위로가 된다.
그 언젠가 요동치는 토요일이 온다면 아마도 나는 이곳에 와서 휘낭시에를 먹지 않을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처음 그대로의 맛을 가진, 그 이름도 고급진 휘낭시에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