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10월 첫 번째 토요일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큰 키, 진한 눈썹, 하얀 피부, 얼굴을 반쯤 가린 커다란 뿔테안경, 깁스를 한 오른팔. 의대에는 공부 말고는 취미도 특기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만 모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훤칠한 사람이 있다니.
어느 해 1월, 입학 전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만들어진 동기모임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남자애가 있었다. 스키를 타다가 팔을 다쳤다는 그 아이는 어찌나 술을 들이부어대던지,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술기운에 목소리가 커지고 비틀거리는 모습에 얼굴값도 못하는 한심스러운 모습에 다짐을 했다. ‘저런 애랑은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지’
입학 후 한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술주정이 얼굴값을 이겼던 그 남자애가 내 옆에 앉았다. 학기 초라 선배들이 불러서, 동아리모임이 있어서, 교수님이 불러서, 동기들과 놀고 싶어서, 여러 이유로 매일 밤 술을 마셔 대는 이 남자애는 매 수업시간마다 졸았다. 쉬는 시간마다 내 필기를 가져가 베껴 쓰는 주제에 내 글씨가 예쁘지 않다고 타박을 하고, 어느 밤엔 술에 잔뜩 취해 전화를 해서는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데 깨워주지도 않느냐며 화를 내고, 어느 날 저녁엔 지갑을 잃어버려 밥도 못 먹었다며 햄버거 좀 사달라고 졸랐다. 이런 애랑은 깊게 엮이면 안 되겠다 싶었는데, 그 남자애는 지금 내 남편이 되었다.
가끔 속 터질 때도 있지만 동기 중에 가장 잘생긴 남자였던 남편, 이제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모습까지 보여주니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었나 보다 싶다. 그런 남편이 점점 못생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올해 봄이었다. 나는 선베드에 누워 첨벙거리며 재밌게 노는 아이와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잠수시합을 하는지 물속 깊이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아이가 물방울을 사방으로 튀기며 물 위로 올라왔고 곧이어 남편이 물 밖으로 솟아오르듯이 벌떡 일어나 나왔다. 물 밖으로 솟아오르는 남편의 머리가 어찌가 휑하던지, 두피가 그대로 드러나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보, 머리가 왜 그래? 머리카락이 너무 없잖아. 정수리까지 훤하다고.”
“그걸 이제 알았어? 요즘 머리카락이 엄청 빠진다고.”
사실 탈모 고민은 하루이틀된 건 아니었다. 결혼 준비를 할 때부터 남편은 간간히 탈모약을 먹거나 두피 관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이 되고 일을 하다 보니 좀처럼 관리할 시간은 나지 않으면서 근무 중에 노출되는 방사선과 스트레스, 잦은 술모임 등으로 탈모가 더 심해진 것이다.
얼마 전 남편의 생일, 종이에 크게 글씨를 써서 봉투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모발이식지원금 500만 원”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남편은 강남의 유명한 어느 성형외과에서 새벽 6시부터 모발이식을 받고 있다. 뒷머리의 모근을 채취하여 한 올 한 올 분리한 후에 비어져 있는 앞머리와 정수리 부분에 다시 심어준다고 했다. 시술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다.
남편의 탈모가 진행되었다고 해서 남편이 다른 사람이 된 것도, 못생겨진 것도 아니었다. 유전과 호르몬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얼마든지 탈모가 생길 수 있고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에게 탈모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훤해진 이마만큼 청춘은 물러나고 세월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자존심을 지켜왔던 것이었다. 세면대와 화장대, 베개 위에 떨어져 흩어진 머리카락들은 지저분한다는 나의 잔소리와 함께 남편의 머리와 마음을 허전하게 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 훤칠한 외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함께 한 세월이 새삼스레 느껴지고 그간의 남편이 홀로 삼켰을 그 고생들이 전해져 마음 한 켠이 시렸다.
기름으로 떡진 머리카락, 핏자국이 선명한 두피, 누런 안색으로 차에 탄 남편에게 괜히 장난을 쳐 본다.
“여보 머리가 빼곡해져서 잘 생겨지는 거 아니야?”
“지금도 잘생겼는데 어떻게 더 잘생겨지니?”
“여자들이 따라다니면 어떻게 해. 얼굴에 코딱지라도 붙이고 다녀.”
오늘의 모발이식이 우리 남편의 잘생김을 다시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조인성 배우님의 네이버 프로필 사진입니다. 우리 남편은 소싯적 ‘노원구 조인성’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