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10월 세 번째 토요일
나는 우리 동네가 좋다.
10년째 살고 있는 동네, 잘 정리된 도로와 곳곳에 마련된 공원, 국제도시라는 명칭에 걸맞은 멋진 건물들까지. 익숙한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평생 살아도 좋을 만큼 우리 동네가 좋다.
우리 동네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때마다 열리는 축제들이다. 맥주축제, 록페스티벌부터 동네 이름을 딴 축제들이 계절마다 열린다. 10월이 되자 우리 동네는 이런저런 축제들로 활기가 넘쳤지만 여러 가지 일정으로 분주한 우리 가족은 축제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제저녁 할로 미술학원 선생님이 학원 근처에서 하는 건강 관련행사에서 페이스 페인팅을 하신다고 말씀해 주신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할로가 페이스 페인팅이 궁금했는지 꼭 가보자고 여러 번 얘기를 해서 토요일 뮤지컬 학원 수업이 끝나면 함께 가기로 했다.
할로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근처 도넛가게에 앉아 행사 정보를 찾아보았다. 가본 적 없는 공원이라 위치와 주차, 먹거리 정보까지 확인했다. 계획과 준비가 되지 않은 일들에 유난히 겁이 많고 주저하는 성격인 데다가 아이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주차 스트레스가 심한 편이라 잘 모르거나 혼잡이 예상되는 곳에는 절대 차를 가져가지 않기 때문에 교통편도 미리 알아봐야 했다. 다행히 근처 버스정류장에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지도 앱의 거리뷰를 켜서 공원의 입구와 대략적인 분위기까지 파악했다. 수업이 끝난 할로를 만나 행사장 화장실이 지저분할 수 있으니 학원에서 미리 화장실도 다녀오라고 했다.
버스정류장 전광판을 보니 좀 전에 버스가 떠났는지 20분이나 기다려야 다음 버스가 온단다. 걸어도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라 할로에게 걸어가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걷기 싫어하는 아이가 웬일인지 알겠다고 했다.
전일 비가 많이 내렸던 탓인지 날씨가 좀 쌀쌀했지만 걷기 나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로와 이렇게 손잡고 길을 걸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듯했다. 아이돌 가수가 꿈인 할로는 아직 뮤지컬 학원에서의 흥이 가시질 않았는지 연신 노래를 부르고 춤 동작인지 뭔지 꿈틀거렸다.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는 공기를 콧 속 깊숙이 들이마시며 길바닥에 떨어진 색 바랜 나뭇잎들을 쳐다보았다. 문득 오늘 날짜가 생각났다. 벌써 10월도 절반을 넘겼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잎이 매정하게 통보하는 것 같았다.
주말인데도 도로에 차가 많았다. 길에도 사람들이 많다. 이번 주말에는 내가 아는 동네 축제만 해도 3개나 있었다. 걷다 보니 유난히 하늘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간혹 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조금은 많아 보이는 중년의 아줌마들이다. 혼자 다니는 사람, 세네 명씩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모두들 비슷하게 편한 차림에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에코백을 들고 있었다.
저 하늘색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번 주말 축제가 예정되어 있는 우리 동네의 가장 큰 공원을 향해 걸어가는 하늘색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하던 순간, 몇몇 사람들이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 동네는 좋은 동네다. 애향심이 큰 사람들이 유난히 축제가 많은 이번 주말, 동네를 위해 축제 안내나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모인 것이 분명했다. 같은 옷까지 맞춰 입은 걸 보면 일회성 모임은 아닌 듯했다. 좋은 동네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사는구나, 나도 이 동네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슴 따뜻한 광경과 오랜만의 산책 데이트, 페이스 페인팅까지 만족스러운 오후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조금 돌아가는 노선이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토요일, 바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다.
버스를 타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들러야 하는 길들이 있다. 할로와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창문을 액자 삼아 밖을 바라다본다. 하늘과 나무, 건물과 사람들. 그 풍경에서 계절과 시간과 날씨를 다시 느끼며 미처 보지 못했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 귀여운 강아지, 엄마아빠 손을 잡고 높이 뛰어오르는 꼬마, 다정히 포옹하는 연인들, 마치 손을 흔드는 인사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 시간 맞춰 색이 바뀌는 신호등.
‘앗, 하늘색!‘
버스가 멈춰 선 정류장 근처에는 큰 대형버스가 줄줄이 서 있었고, 아까 우리가 봤던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백 명 모여있었다. 풍선이며 야광봉 같은 것들을 파는 노상도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임영웅콘서트 날이었다. 평소 연예인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임영웅 씨의 팬덤 컬러가 하늘색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온 분들을 그저 동네 행사 자원봉사자로 착각하다니.
할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엄마, 오늘 임영웅콘서트인가 봐. 저기 쓰여 있네. 저 사람들은 다 그 콘서트 보러 온 거야? “
”응. 와. 임영웅 씨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네.“
“엄마, 나도 가수 되면 저렇게 사람들이 나 보러와?”
“그럼. 당연하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올지도 몰라.”
“엄마도 꼭 올 거지?”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할로 공연하는 날에는 제일 먼저 가서 맨 앞에 앉을 거야.”
상상하는 할로를 보고 있으니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나는, 각자의 영웅을 향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