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사고(思考) 일지
세기말의 통섭(convergenece), 오늘날에는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진 개념은 무릇 아마추어 과학자들과 적당한 전문성을 가진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이 미덕이라고 믿게 만든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지식의 줄기들이 만나 하나의 강으로 흘러가는 일. 이론적으로는 여러 학문들이 그 뿌리에서 대중주를 이루는 이상적인 것처럼 들리나, 실제로는 피상적인 결합을 감추기 위한 마케팅적 수단처럼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통섭은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어설프게 아는 사람의 자기방어적 주장에서 흔히 나타난다. 한 분야에 대해서 그래도 헌신한 적이 있다면, 이는 비교적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를 ‘미숙한 번역가’라 부른다. 현장에서 통섭이라는 것은 화려한 말로 포장한 것보다 훨씬 장엄하지 않은 형태로 다가온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반드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자명한 연결들도 통섭으로 설명됨에 실망한 적도 있다. 이를테면 같은 대상에 대해 미묘하게 다른 기술(description) 정도이다. 이 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그와 비례하게 담백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학적인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간결한 논리의 연쇄이다. 통섭은 이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악용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반대로 통섭의 좋은 사례는, 서로 다른 두 대상 간에 아주 세심한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를테면 생명과학은 늘 빠르게 움직인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일 년 사이에 연구의 패러다임이 바뀌기도 한다. 실험은 늘 쏟아지고, 결과는 매주 새롭게 생겨난다. 반면 수학은 아직도 전통적인 정의와 정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new replaces old)을 대체하는 형태의 학문이 아니기에, 가정을 검토하며, 증명을 다듬는 일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미완으로 남는다. 필자는 이 두 속도를 동시에 맞추려다 종종 지쳐 버린다. 실험실 사람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달려 나갔는데, 나는 여전히 전 단계의 데이터에서 수학적 구조를 끌어내는 데 머물러 있곤 했다. 이러한 지저분하고 복잡한 작업을 완벽하게 해내곤 하는 여러 분야의 대가들이 있다. 그들(이름을 언급하지는 않겠다)을 보고 있자면 그 기여는 진정한 통섭에 훨씬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발견을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 간극을 메우는 일에 집중하였으며 통섭이 ‘완전한 통합’이 아니라는 점, 서로의 언어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종종 통섭을 다리 놓기에 비유한다. 강 양쪽에 선 사람들이 조금씩 돌을 나르고, 그 돌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이어질 때, 강을 건너는 가능성이 생긴다. 다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발밑의 빈틈을 확인하며 건너야 하지만, 언젠가 그 길을 따라 더 단단한 다리가 세워질 것이다. 연구자의 정체성이란 아마도 이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닐까. 다리가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돌을 옮긴 흔적은 남는다.
나는 여전히 두 언어 사이를 오간다. 실험실의 어수선한 소리와 수학적 증명의 고요함이 교차하는 곳에서, 통섭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조금씩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가는 경험이 쌓인다. 나는 이제 통섭을 하나의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하려 한다. 불완전한 다리 놓기, 속도의 불협화음을 견디기,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의 오역을 감내하기. 그 모든 것이야말로 내가 연구자로 살아가는 이유다. 통섭은 도착지가 아니라, 길 위에서 반복되는 작은 걸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