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26일 차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왔다. 계획된 여행은 아니었고. 남편 출장길에 비행기 표 한 장 얹혀 다녀온 여행이었다. 즉 숙소가 무료로 제공되는 기회였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쟁취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떠나기 10일 전에 통보된 일정. 하필이면 만료된 여권. 그사이에 껴있는 명절. 만만찮은 비행기 표 값. 비자 신청. 여행자보험가입. 갑작스러운 회사 업무 등. 장애물이 계속됐지만, 그 무엇도 나의 샌프란시스코행을 막지 못했고. 나는 회사로부터 일주일 휴가를 받아내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남편의 이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이건 남편과 함께 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형태가 조금 다를 뿐. 혼자 떠나는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첫 날을 제외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업무 일정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열심히 떠날 준비만 했다.
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괜찮지 않았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샌프란시스코가 아른거렸고, 귓가에는 스콧 매켄지의 곡이 들려왔다. 무서웠다. 자꾸만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불안과 공포가 어디서 온 건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미 다녀온 적이 있는 도시였다. 나이 서른을 코앞에 둔 12월 31일.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전에도 발리, 제주도, 일본, 멕시코, 미국 다른 도시를 혼자 다녔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혼영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당황하며 안절부절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렸고 예약해둔 셔틀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당황하거나, 겁먹거나,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 이유는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라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 적이 있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허리를 세우고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갈색머리, 노란 피부, 커다란 덩치, 까칠한 수염, 험악한 인상까지. 그는 내게 웃으면 "하이"라고 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뉴욕 출신인가? 인사 후, 랩을 쏟아내듯 그는 말을 이어갔고. 나는 집중했지만 "같이 갈래?" 정도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노땡큐.
손을 내저으면 다시 걸었다. 그가 따라왔다. 여행 중에 작업을 걸어오는 남자가 전혀 없던 건 아니다. 가물에 콩 나듯 다가오는 남자들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한국 남자는 없었고. 일본, 중국, 대만 등. 동양인이 대부분이었다.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여행지 로맨스가 벌어지진 않았다. 나는 낯선 나라에서는 친절한 사람까지도 경계하는 예민한 여행자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서양인이었다. 그는 친절하기보다 집요했다. 겁이 났다. 계속해서 어딘가를 같이 가자고 했다. 태워다 준다고 했다. 앞만 보고 걸었다. 표정이 굳어갔다. 계속 나를 따라왔다. 그러다 내 귀에 걸린 단어가 있었다. 바로 ‘셔틀’이었다.
사실은 이랬다. 남자는 내가 예약한 셔틀 회사의 직원이었고. 차를 타는 장소가 바뀌어서 안내하기 위해 서 있었고. 마침 작고 땅땅한 동양 여자인 내가 ‘셔틀 예약 용지’를 펄럭이며 그곳에 나타났다. 나는 고객이었고. 그는 직원이었다.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해 그는 랩이 아닌 발라드 속도로 자세히 설명했고. 그제야 아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상황을 이해한 나는 얼굴이 좀 붉어졌다. 정면으로 다시 본 남자는 훈남이었다. 역시 그럴 일이 없는데, 지나치게 경계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하필 여행 전날 영화 <테이큰>은 왜 봤을까.
숙소는 롬바드 스트리트 근처였다. 한국인 아내와 미국인 남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경사진 길 가운데 위치했던 그 집의 매력은 대단했다. 끙끙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다가 만나는 풍경이 예술이었다. 게다가 바로 옆 골목에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정거장이 있었다. 그 거리에서 마주한 샌프란시스코는 내게 이상한 주문을 걸었다. 여긴 네가 만난 여행지 중, 네게 가장 아름다운 곳이야,라고. 실제로 훗날 누군가 내게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샌프란시스코’는 꼭 언급했던 것 같다. 그랬다. 지나온 여행지는 흘러간 과거와 비슷했다. 돌이켜보면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선명하다.
사실 혼자 다녀온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풍경만큼 완벽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은 곳 중 한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몇 가지의 나쁜 기억이 있었으니까.
나쁜 기억 1. 가지 말아야 할 길
식탐이 많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먹고 싶은 건 어떻게든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그랬다. 다운타운에 에그 베네딕트가 훌륭한 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종이 지도를 펼치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몇 번씩 길을 헤매는 길치였으니까. 그날도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았다. 그러던 한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주겠다는 것. 전날 공항에서 과하게 현지인을 경계했던 것을 반성했던 나는, 고맙다며 그가 알려주는 곳으로 향했다.
그
런
데
이상했다.
그가 알려준 곳으로 갈수록 마리화나 냄새와 악취가 진동했다. 이런 곳에 에그 베네딕트 식당이? 의아했지만 현지인이 알려주는 지름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게가 있다는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일단 거리를 뒀지만 내 뒤에는 이 길을 알려준 외국인이 곁눈질로 보였고. 들어가야 할 골목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되지만, 삼삼오오 모여있는 이들의 표정, 말투, 옷차림은 미드에 등장하는 위험한 사람들과 꼭 닮아 있었다. 겁이 나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섰다. 그때 그 외국인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저쪽으로 들어가면 그 가게 있어.”라며 나를 다시 그 골목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노땡큐,라고.
숙소로 돌아와 민박집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그 골목은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위험한 곳으로, 남자도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나쁜 기억 2. 드물게 일어나는 일
3일째 되는 날. 노숙자 골목 사건을 잊기로 하고, 이번에는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그곳에 꼭 먹어야 할 에그타르트가 있다는 정보를 수집! 먹지 못한 에그 베네딕트의 아쉬움을 달래볼 참이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란 얘기가 있었지만, 전날 들어갈 뻔했던 골목에 비하면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
런
데
이상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등에서 신호가 왔다. 메고 있던 가방이 내가 가는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돌아보니 두 명의 동양인 남자가 내 배낭의 앞주머니를 만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설픈 소매치기였던 것 같다. 무서웠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있는 힘껏 가방을 몸 쪽으로 당긴 후 한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에그타르트를 샀지만, 그 맛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나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의 오감을 마비시켜버렸으니까.
숙소로 돌아와 민박집 주인장에게 이야기하니. 아주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나쁜 기억 3. 위험한 동행자들
여행 마지막 날. 페리 빌딩 주변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고 나오는 길에 익숙한 말이 들려왔다. 한국인이세요? 평소의 나라면 대답하지 않고 지나갔겠지만, 하루에 한 번씩 이상한 일을 경험했던 탓인지. 네 맞아요!! 하며 반갑게 돌아봤다. 그곳에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세 사람은 커뮤니티에서 만나 동행을 하고 있다며 내게 혼자 왔냐고 물었다. 살갑게 말을 붙이는 그들에게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자 여자가 내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같이 한잔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유독 외롭고 무서운 여행이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나는 미안하다며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런
데
이상했다.
거절하고 돌아서는 내게 그들은 끈질겼다. 응? 우리 10분 전에 길바닥에서 만난 사이 아닌가? 처음에는 자신들의 숙소가 있는 곳에서 한잔하자더니. 부담되면 술집으로 가자더니. 술이 부담되면 커피를 마시자고 하더니. 끝내 내가 가겠다고 하자. 간곡히 내 팔을 붙들며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갑자기 그들이 의심스러웠다. 어쩐지 단순한 여행자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각자 혼자 여행을 와서 만난 사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친근해 보였고. 같은 숙소를 머무른다는 점. 그리고 차를 빌렸다는 것까지. 따져보니 모든 게 다 이상했다. 결국,
약간의 성질을 부린 후에야 세 사람에게 벗어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주인장에게 말했더니. 세상에나 그런 일은 또 처음 듣는다며, 자신도 조심해야 겠다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만 얘기했었다. 아마도 ‘혼자 멋진 여행을 다니는 여자’라는 주변인들의 말을 의식했던 것 같다. 속으로는 늘 운이 좋아서 아무 일 없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두 번째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가기 전날 밤. 계속해서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다운타운에서 무서운 골목으로 들어가고, 차이나타운에서 가방을 빼앗기고, 낯선 사람들에게 감금됐다. 이 꿈은 비행기 안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온 샌프란시스코에는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론 다시 봐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기분 탓인지. 전보다 노숙자가 훨씬 많이 보였고. 또, 또, 또, 이번에는 내 발로 그 위험한 골목에 들어갈 뻔했다. 덕분에 아주 잠깐 스릴러 여행이 될 뻔했지만, 예리한 촉으로 발 빠르게 돌아 나왔고. 종이 지도와는 차원이 다른 구*지도 덕분에 전보다 수월하게 혼영을 할 수 있었다. 몇 가지 황당한 사건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여행의 끝은 괜찮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보니, 역시 난 운이 좋다.
PS.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센 척하며 혼자 다닌 여행이 즐겁다고 했지만, 사실 그 여행 속에는 무섭고 불안했던 순간이 많았고. 덕분에 매번 홀로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불길한 일들이 떠올라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행 동행자를 구하지 않았던 건.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와 불신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사실 간이 콩알보다 작은 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