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25일 차
이제 곧 결혼 5년 차. 부부 사이가 좋냐는 질문에 장난스럽게 “난 아직 내 남편을 사랑해”라고 했더니. 친구가 저렇게 받아쳤다.
지난달, 긴 지방 출장을 다녀왔다. 사무실에서 오후에 출발해서 밤늦게 부산에 도착했고. 5시간 취침 후, 12시간 정도 현장 업무를 하고. 또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일하다가. 금요일 저녁 집에 와서 아픈 남편에게 죽을 끓여 주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전화 온 아는 언니에게 ‘요즘 힘들었다’는 말을 했더니. 저렇게 나를 다그쳤다.
우리 부부는 딩크족은 아니다. 그저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간절하게 임신에 매달린 적은 없지만, 난임 병원에 갔었고. 한약을 먹었고. 몇 가지의 미신을 믿고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임신에 대한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은 있다. 그렇다고 절망하거나 우울함에 시달리는 부부는 아니다.
아직 ‘아이 있는 삶’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이혼한 오빠를 대신해 엄마와 조카를 (가끔) 함께 키웠고. 회사 업무 특성상 출산 후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을 인터뷰하는 일이 많다. 그러니 ‘아이 있는 삶’을 쥐뿔도 모르는 건 아니다. 가끔 엄마가 될 미래가 두렵기도 하니까.
결혼한 후 ‘아이가 없어서 넌 모른다’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때로는 훈계처럼, 때로는 위로처럼, 또 때로는 분풀이처럼. 솔직한 성격이라. 불필요한 참견과 잔소리에 일침을 가하는 편인데, 이 말 앞에서는 괜히 숙연해져서 입을 다물곤 했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로운 집에 이사한 후, 층간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으나. 윗집에는 어림잡아 4살, 6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있다. 안다. 가장 힘이 넘치는 때란 걸. 뛰고, 또 뛰고, 물건을 던지고, 의자를 밀고, 쿵쿵쿵 쿵쿵. 짜증이 났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인 건. 남편과 내가 맞벌이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럭저럭 참을 수 있는 평일과 달리. 주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 7시부터 아이들은 뛰고, 부모들은 대청소하는지 가구를 끌고, 청소기를 돌렸다. 소음이 치명적이었다. 잠들면 업어가도 모를 우리 부부까지 일찍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소리는 밤까지 이어졌다. 결국, 남편이 윗집을 찾아갔다.
윗집 남자는 “죄송하지만, 좀 시끄럽네요.”라는 남편의 말에 저렇게 되물었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남자아이 둘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바닥에는 매트 한 장 깔려 있지 않았고. 윗집 여자는 남편을 째려봤다. 남자는 사과 한마디 없이 “아이들 주의시킬게요.”하면 문을 닫았다. 기분이 좀 상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진짜 화가 난 건, 다음 상황이었다.
10분이 지났을까. 윗집 남자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문을 열자. 남자는 우리에게 물었다. 아이가 있냐고. 황당했지만 일단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윗집도 시끄러운데, 우리도 참고 산다. 그러니 너희도 공동생활하는 아파트에서는 좀 참아라.’ 이렇게 해석되는 말이 아니었다. ‘당신들이 아직 아이가 없어서 모르는데, 다들 이러고 살아, 그러니까 당신들만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없으면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없어도 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배려’가 아닌 ‘함께하는 배려’가 필요하단 걸. 그렇지만 차마 이런 말을 꺼내진 못했다. 끝내 “죄송한데,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는 좀 주의해주세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아이가 없어서 모른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들린 적은 없었다.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에 의해서 ‘내 삶이 단정 지어지는 것’이 싫었다. 나의 ‘힘듦’이 누군가의 ‘힘듦’과 비교되고. 곧 별거 아닌 일로 치부되는 게 못마땅했다. 아이가 있어서 더 힘든 사람도 있고. 아이가 없어서 더 힘든 사람도 있고. 아이가 있어서 더 좋은 사람도 있고. 아이가 없어서 더 좋은 사람도 있다. 우린 그저 각자의 삶에 주워진 ‘힘듦’과 ‘기쁨’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