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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Mar 28. 2019

나의 찬란했던 호구시절

글쓰기 팁2. 소환해봐. 너의 흑역사


  얼마 전, 민주를 만났다. 회사 동료와 갔던 쇼핑몰에서 마주친 것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이런 만남은 대부분 상대의 눈썰미로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나를 먼저 부른 쪽은 민주였다.    


  “혹시 이. 하. 루?”    


  고개를 돌리자. 초등학교 시절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는 민주가 보였다. 만약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아!”    


  인사 대신 짧은 탄식(?)으로 나도 그녀를 알아봤음을 표현했다. 우린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게 됐다. 환하게 웃고 있는 민주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오랜만이지?”    


  20년 만에 보는 거니까. 오랜만이긴 했다.    


  “그러네.”     


  대화가 뚝, 끊어질 수 있도록 짧게 대답을 했다. 침묵이 이어졌고. 그제야 민주가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유모차가 보였다. 그 안에는 아들인지, 딸인지, 성별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예쁜 아기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셋째야.”     


  궁금하진 않았지만, 민주의 말에 좀 놀랬다. 외동딸이었던 아이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셋이나 낳다니. 어렸을 적 그녀가 ‘난 나중에 빨리 결혼해서 아이 셋은 낳을 거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러나    


  “아… 셋째….”    


  “잘살고 있어서 보기 좋다”라는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서먹해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나의 무반응에도 그녀는 내가 궁금했던 걸까. 민주의 질문은 계속됐다. 사는 곳, 결혼 여부, 자녀, 직장 등. 묻고 또 물었고. 난 짧게 답변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민주도 지쳤는지. 짧은 순간 한숨은 내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가끔 이렇게 보자.”

  “그래.”    


진짜 1도 모르겠을 말을 남기고 민주는 돌아섰다.


  다음에 또 보자. 그럼 잘 가 등. 명쾌한 인사법도 많은데 그녀는 ‘가끔 이렇게 보자’라고 했다. 언젠가 또 마주치게 될 거란 걸 예감했거나. 아니면 나의 무뚝뚝한 반응에 당황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누군데요?”    


  그녀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회사 동료가 물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요. … 호구였죠.”

  “호구요? 저분이 하루 씨 호구?”

  “아뇨. 제가 쟤 호구였어요.”

  “헐! 거짓말. 할 말 다 하는 하루 씨가?”

  “그럼요. 저도 호구였던 시절이 있었죠.”         




  요즘 말로 민주는 인싸였다. 늘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녀의 위치는 언제나 센터였다. 그 시절 11살, 12살 여자아이가 인싸가 되는 법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만. 민주는 쾌활했고, 운동을 잘했고, (민주네 부모님이) 부자였다. 얼굴도 예쁘진 않았지만 매력적이었고. 나쁜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즉흥적일 때가 많았고. 미국에서 전학 온 아이답게 ‘스웩(Swag)’이 남달랐다. 선생님과 대화할 때도 눈을 똑바로 바라봤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했고. 아닌 건 아니라고 했다. ‘스웩’이란 단어를 모르던 시절. 아이들은 그 모습을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표현했는데, 민주도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미국에 있을 때”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여자아이는 순식간에 인싸가 됐고. 점점 민주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호구의 첫 번째 착각. 쟤들은 호구고, 나는 친구야

  순식간에 모든 것이 민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교 후에는 무엇을 할지. 누구네 집에 가서 놀지. 무엇을 먹을지. 몇 시에 헤어질지 등. 그녀가 말하면 모두가 따랐고. 종종 그녀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날도 생겼다.   



  

  아이의 세상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집중된 권력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거 없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권력에 익숙해지면 사람과 상황을 마음대로 조정한다. 가끔은 아주 부당하게 말이다. 그러나 잘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아무도 토 달지 않으니까.     


  “난 소영이 생파에 안가. 니들도 가지 마.”

  “지예야 나가서 라면 좀 사 와”

  “난 혜정이 싫어. 다들 쟤랑 말하지 마.”    


  나도 민주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하라면 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와의 우정은 내게는 작은 공포였다. 그러다 보니          


  “넌 고무줄 못하니까. 저기서 깍두기로 서 있어~”    


  싫어하는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혼자 얌전히 있게 됐고.         


  “쟤 혼자 남은 거 봐. 불쌍하네. 하하하”    


  ‘우리 집에 왜 왔니’를 할 때, 그녀가 재미로 나를 혼자 남겼을 때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헤헤.    


  “쟤 빨간 돌 건드렸잖아! 내 말이 맞지?

  “응”    


  물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친구와 좀 더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은 공포로 바뀌었고, 충실한 호구를 탄생시켰다. 나는 열심히 민주를 따라다니면서, 그녀가 나를 다른 호구들과 달리 가장 친한 친구로 승격시켜주길 바랐다.     




  이런 관계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끝내 민주의 가장 친한 친구는 슬기가 됐다. 슬기는 민주에게 굽실거리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조용한 아이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산다는 정도였다. 6학년 때였던가. 슬기가 다른 도시로 전학가게 됐을 때, 민주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펑펑 울면서 이 소식을 전한 적이 있는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꼴 보기 싫어졌다. 많은 아이들이 그녀를 위로했지만, 난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는 민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웃으면 우습 게 보는 사람들이 있긴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민주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다면 나의 호구시절은 그렇게 끝났을까? 에이 설마. 중학교 때는 다른 친구에게 그랬고, 고등학교 때는 연예인에게 그랬고, 대학 때는 남자 친구에게 그랬고, 사회에 나와서는 상사와 애인에게 그랬다. 호구 짓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내 손발 오그라들 걸 알면서도, 끝끝내 이불 킥을 날리 게 될 걸 알면서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중 소름 돋는 흑역사는 ‘양다리 걸친 남자 친구에게 차여놓고도 매달렸던 사건’이 아닐까 싶다. 만약 그 전 남친을 다시 만난다면, 그가 내게 다가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면, 나는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꺼져.”    


  부끄러움과 상처를 남긴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쨌든 그 시간도 내 시간이고. 나는 그 시간을 거쳐 성장했기 때문이다. 때론 조직과 무리에서 배제될 수도 있고, 때론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나의 진가를 몰라주기도 하고, 때론 애틋했던 상대가 나를 너무 쉽게 버리기도 한다는 것. 지금의 난 이런 것들로부터 덜 상처 받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행복이 아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관계와 거리를 만드는 거란 사실도 알게 됐다. 고로 내가 가진 가장 뜨거운 마음을 아낌없이 쏟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이 흑역사라 불러도, 민주와 함께했던 시간은 내게 ‘창피했던 호구시절’이 아니라 '찬란했던 호구시절'이었다.



꿀팁 없는 글팁2 


  소환해봐. 너의 흑역사!


  시험 점수가 잔인하게 공개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실처럼 가늘고 긴 종이를 칠판 옆에 붙이면,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종이에는 번호 순서대로 점수가 적혀있었는데, 전날 시험 본 과목이었다. 이름보다 번호로 더 많이 불리던 때였고. 참고로 나는 15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방식으로 체육 성적이 공개됐고. 나는 내 점수를 확인하고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15 15’    


  나의 중간고사 체육 필기시험은 15점. 시험지를 확인해 보니, 진짜였다. 따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찍어도 반타작은 했었는데, 쩝. 안타까움에 책상에 코를 박으려던 순간.  


  “하루야 너 15점으로 나왔어! 잘못된 거 같으니까. 담임쌤한테 확인해봐.”    


  목소리 큰 친구의 걱정으로 몰라도 될 아이들까지. 내 점수를 알게 됐고. 엉겁결에 나는 거짓말을 했다. 잘못된 것 같다고. 하지만 사건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친구의 과한 걱정으로 아이들은 점수를 판독하는 기계의 정확성을 의심했다. 내가 15점이란 사실을 인정하면 끝날 수도 있음에도, 나는 입을 닫고 있었다. 창피했으니까. 친구는 정의구현하겠다며 담임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교무실로 호출됐고, 답안지를 밀려 쓴 것 같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친구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시험감독을 했던 선생님 탓이란 것. 지목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체벌이 잦고, 종종 폭언도 했다. 그런 그가 시험 때 빨리 내라고 재촉했던 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긴장한 학생이 답안지를 밀려 쓰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다는 것. 어휴 저걸 확. 결국, 난 악다구니를 쓰며 진실을 고백하게 됐다.     


  “그래. 나 15점이다!!!!    


  이 사건으로 세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 쫄릴수록 솔직해지자. 둘, 예체능 필기시험도 공부하자. 셋, 목소리 큰 친구를 피하자. 이렇듯 흑역사는 인생의 묵직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    


  글은 ‘신비주의’보다 ‘솔직주의’로 썼을 때 통하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을 닫아놓고, 상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상대가 나를 공감해 주길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르니까.

  슬쩍 한 마디 더 보태면, 의외로 ‘나만의 흑역사’라 생각했던 일이 ‘우리들의 흑역사’인 경우가 많다. 사람 사는 게, 저마다 다 다르면서도 비슷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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