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쯤, 폭우로 사당역 부근이 침수된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폭우, 홍수, 침수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빨간 경고에도 꿋꿋하게 집을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였다. 왜 그랬냐고? 출근해야 하니까. 나는 회사원, 아니 직원이니까. 먹고살아야 하니까.
매일 출근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쯤 매일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그날도 깨어보니 빗소리가 들렸고. 밖으로 나와 보니 하늘이 짙은 회색빛이었다. 날씨 탓에 기분이 조금 우울했지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선릉역에 있는 회사를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사당역에 가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소요시간 1시간 40분. 왕복으로 계산하면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만 하루에 최소 2시간이었다. 부족한 잠을 방 침대가 아닌 버스에서 충전해야 하는 이유였다. 비 때문인지 평소보다 버스가 늦게 왔다. 눅눅한 광역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꽉 안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싸한 기분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평소라면 이미 지옥철에 몸을 실어야 할 시간이었다. 버스는 남태령에서 발이 묶인 것 같았다. 늘 교통체증이 심각한 구간이었다.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창밖을 살피다가. 두려움을 느꼈다. 무섭게 굵어진 빗줄기도 그랬지만, 도로가 물에 잠겨 있었다. 찰랑찰랑. 버스는 도로가 아닌 물 위에 멈췄다.
버스야 너도 살려면 수영 배워라
세상 나 몰라라 입을 벌리고 자던 옆자리 남자도 꿈속에서 이 사태를 확인한 건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다가. 겁먹은 목소리로 버스 기사님께
“기사님. 우리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죠?”
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결국, 남자가 쏘아 올린 작은 공포심은,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을 동요시켰다.
불안해진 승객들이 취한 행동은 같았다.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것. 물론 용도는 저마다 달랐다. 찰칵찰칵. 누군가는 이 와중에도 ‘좋아요’를 위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고. 누군가는 여보, 엄마, 자기야, 나 어떡해, 하면서 가족과 지인에게 SOS를 쳤고. 누군가는 인터넷으로 현재 상황을 체크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의 첫 번째 행동은 이랬다. 과장님 폭우 때문에 버스가 물에 잠겨서 지각할 것 같아요. 대리님 저 지각할 것 같은데 회의는 어쩌죠? 김 차장 오늘 미팅 시간을 좀 미뤄야 할 것 같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상황으로 인해 회사에서 난처해질 일들을 걱정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선배님, 천재지변? 아니 자연재해? 아무튼 불가항력적 상황으로 인해 아홉 시까지 회사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거긴 한파 여긴 물난리 근데 출근
버스는 승객을 위해 꾸역꾸역 힘을 내어 전진했지만, 끝내 멈춰버렸다. 기사님은 도저히 더는 못 간다며 운전석에서 항복 자세를 취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또 옆자리 남자는
“기사님. 이렇게 승객을 포기하실 건가요?”
라며 기사님의 직업정신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와 함께 기사님께 항의하는 사람들보다, 스스로 이 위기에 대처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역이 저 멀리 보였다. 날씨가 좋다면 딱 걷기 좋을 만큼의 거리에 사당역이 있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를 쳤다.
“지하철 2호선이랑 4호선은 정상적으로 운행하나 봐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였다.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 안은 정글. 먹고 살기 앞에서 모험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선배의 신경질도 찰떡처럼 잘 받아냈다. 차장님의 아슬아슬한 발언도 매끄럽게 넘겼다. 실장님의 편애도 너그럽게 이해했다. 그러니 이쯤은 껌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리는 승객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굵은 빗줄기는 바람을 타고 더욱 공격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레인부츠를 신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날 신고 나간 샌들이 리얼 가죽이 아닌 싸구려 인조가죽임에 감사했다.
폴짝, 뛰어 보도블록 위로 안착했다. 물은 발목까지 차올라있었다. 나는 힘겹게 우산을 펼쳤다. 3단 우산은 강력한 빗줄기로부터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가방과 어깨는 순식간에 물에 젖었고. 바닥의 흙탕물은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로 흘렀다. 나는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힘차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나아갈수록 사당역은 가까워졌지만, 물은 조금씩 깊어졌다. 어느새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함께 뛰어내린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 얼굴에는 ‘아무래도 버스에서 성급하게 내린 것 같다’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되돌아가기에는 정말 애매한 거리. 어쩔 수 없었다. 걸을 수밖에.
드디어 역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망연자실한 뒤태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나는, 출구를 보고 주저앉아 흙물에 엉덩이까지 담글 뻔했다. 역으로 들어가는 출구가 ‘출입통제’라는 팻말과 함께 막혀 있었다. 원망의 눈길로 뒤돌아 버스를 노려보려던 순간.
“반대편 입구로 사람들이 들어가네요.”
중년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반대편을 보니, 진짜 사람들이 출입구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로를 건너면 사당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도로였다. 평소라면 차와 버스가 징글징글하게 얽혀 있어야 할 도로는 침수로 인해 한산한 것처럼 보였지만, 물이 꽤 깊어 보였고, 보도블록 위로 흐르는 물보다 물살의 속도도 빨랐다.
늘 선구자는 존재하는 법. 이번에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려 했건만, 겁 없이 도로로 뛰어드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고. 도미노처럼 한 사람씩 그 뒤를 따랐다. 늘 그렇듯 나는 이번에도 휘말렸다. 후회의 크기를 가늠할 때쯤에는 이미 도로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대체 왜. 나는 아마존이 아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는 걸까?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착잡함이 극에 달할 때쯤에는 도로 중앙까지 와 있었다. 후회 따위는 넣어둬. 넣어둬.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야 했다.
중간 지점을 조금 지나자 물살이 강해졌다. 작고 땅땅한 내 몸이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넘어지면 어쩌지? 흙물에 엉덩이를 포함한 온몸을 담그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또 그 남자였다. 버스에서 툴툴거리던 그 옆자리 남자 말이다.
그 남자는 왜 거기 있었을까
역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고. 나 또한 그처럼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뒤에 있는 여자에게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 손은 잡은 여자도 뒤에 있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 손길은 계속 이어져.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도로를 건너게 됐다. 남남끼리, 이토록 따뜻했던 순간이 또 있었던가. 늘 고독하기만 했던 출근길을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 하다니.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감동할 뻔했다.
드디어 반대편 출구에 도착했다. 이게 만약 영화였다면, 나와 손을 내민 그 남자는 이 일을 계기로 계속 엮이면서 연인 사이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거긴 현실이었다. 남자는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내 손을 뿌리치고 지하철 입구로 뛰어 내려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인 건, 남자는 4호선, 나는 2호선으로 가게 되어, 내가 남자를 쫓아가는 모양새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영화 한 편 찍고. 지하철 찍고. 회사 찍고. 사원증 찍고. 드디어 사무실에 발 도장을 찍었다.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쩜 이럴까. 나만 빼고 모두 출근해 있었다. 나는 팀 사람 수만큼 ‘죄송합니다’를 읊조린 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너덜너덜한 꼴로 도착했건만.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동시에 노트북을 켰다. 서럽고 어지러웠다. 보통 영화의 러닝타임은 120분. 오늘 내가 찍은 재난영화는 180분. 진짜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이 주어지지만. 현실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주인공에게 새드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근해야 했으니까.
업무 각잡고 사무실 탈출
바로 업무에 돌입할 생각은 없었다. 대충 일하는 각을 잡아두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흙탕물로 인해 허벅지까지 거무칙칙했다. 청소 여사님이 계시지 않은 걸 확인한 후. 다리를 세면대로 올려 닦았다. 하늘만큼이나 짙은 회색빛 물이 다리에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비누는 없었다. 퇴근하기 전까지는 이 찝찝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업무가 하나 더 늘었다. 내 다리 때문에 지저분해진, 세면대 청소!
폭염, 한파, 미세먼지, 비, 눈, 교통체증, 지옥철, 헬 버스 등.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데, 출근길은 하루가 더하게 독해지는 것 같다. 역시 남의 돈 벌어먹기, 참 힘들다.
꿀팁 없는 글팁3
단서를 남길 것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기특하게도 스스로 책상 의자에 앉았다. 밀린 방학 숙제를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맘때면 오빠가 내 방에 들어와
“야! 내놔!”
하며 일기장을 빼앗아 갔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난 매일 일기를 썼냐고? 에이 설마. 내 일기장도 순수한 백지상태였다. 그렇다면 오빠가 일기장을 가져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날씨’ 때문이었다. 나는 허술한 듯. 치밀했다. 선생님께 일기를 몰아 썼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매일 날씨를 기록했다. 비가 내린 날, 눈싸움했다거나. 흐린 날, 태닝을 했다는 건.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으니까.
실제로 기록된 날씨는 내게 ‘레드썬! 효과’를 불러왔고. 창작 없이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날씨의 기록’은 ‘메모의 효과’였던 셈이다.
많은 유명인이 ‘메모광’이고. 특히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메모는 필수’란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이미 많은 곳에서 읽고 들었을 테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도무지 정갈한 메모 습관에 길들지 않는 ‘다이어리&노트 작성 실패자’들을 위한 방법이다. 참고로, 나는 메모에 대한 노력을 접고 짧은 단서를 남겨두고 자주 열어보는 편이다.
<게으른 자를 위한 기억의 재구성>
1. 메시지 다시 읽기
: 카톡은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 날 어떤 일이 있었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친구 또는 가족에게 보낸 카톡은 기억하고 있다. 메시지의 힘을 알게 된 후에는 내가 나에게 카톡을 보낼 때도 있다. 공유하기 힘든 일이나 감정 또는 링크를 저장하기 위해서다. 이 방법의 단점은 휴대전화를 바꾸거나 방을 나가면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2. 사소한 일정 쓰기
: 크고 작은 일정을 휴대전화 캘리더에 기록해 둔다. 예쁘고 상세하게 기록하기 위해 매년 다이어리를 샀지만 늘 3월로 접어들면, 다이어리는 집에 홀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캘린더에는 일기장 날씨와 마찬가지로 자주 기록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본사 회의, 엄마 선물 구매, 소음 관리실 전화, 바지 교환 등. 사소하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을 짧게 작성하고. 완료하지 못했을 때는 그대로 두고 또 다른 날짜에 적는다. 이런 기록은 은근한 기억 회생 효과를 준다.
3. 밑줄 쫙 대신 찰칵찰칵
: 신문, 책, 잡기를 읽다가 좋은 문장이나 이야기가 있을 때 사진을 찍거나 스크린 샷으로 저장한다. 체계적으로 파일로 스크랩을 하거나. 따로 노트를 만들 수도 있지만, 정리가 어려운 내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진을 찍어서 신문기사는 에버노트에 올리고, 책 문구와 이미지는 비공개 계정 SNS에 올려둔다.
4. 결정적 단어를 남길 것
: 길고 상세한 글이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문장은 잘 써지지 않는다. 특히나 메모할 때는 더욱 그렇다. 즉흥적으로 보고 느끼고 떠오른 것을 쓸 때, 깊게 생각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게으른 자들은) 꾸준히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주로 단서처럼 단어를 나열해 두는 편이다. 예를 들면 사당역, 침수, 샌들, 이상한 남자, 지각, 야근. 이런 식으로 말이다.
5. 보고 또 보고
나는 산만한 기록(?)들을 킬링타임용으로 열어보곤 한다. 남들이 보면 해석하기 힘든 문자지만, 쓴 사람이 보면 소중한 보물 창고다. 게다가 길이도 짧고 간결해서, 한 번에 많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읽다 보면 쓸만한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