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우린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했고. 곧잘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봤지만, 실전에는 약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공통점에 있었다. 하나, 소개팅 외에는 연애가 시작될 건더기가 없는 일상을 산다. 둘, 언뜻 활발한 것 같지만 친밀한 관계에는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애써 좋게 말하면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굳이 나쁘게 말하면 ‘수동태 인간들’이었다.
수동태 남자와 수동태 여자가 소개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번 주는 약속이 있네요. 다음주는 괜찮고요.’
‘다음주는 여행 갑니다. 다다음주는 일정 괜찮습니다.’
‘아, 저는 다다음주는 친구 결혼식이 있어요. 다다다음주가 좋겠네요.’
‘저는 다다다음주에는 돌잔치 갑니다.’
‘그럼 일단 다음에 다시 시간을 잡아 볼까요?’
‘그럼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가끔 주말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이 편안해 지더라.
콩트가 아니다. 실화다. 우리의 첫 대화는 이렇게 끝났고. 한 달간 연락이 없었다. 그의 친구와 나의 친구는 단 하루 만에 소개팅을 성사시켰고. 일사천리로 연락처 교환까지 마쳤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지하철 4 정거장 거리에 살면서 만나지 않고 있었다.
약속을 구체화시킨 건, 또 주선자들이었다. 이딴 식이면 다시는 소개팅을 안 해준다는 협박과, 이제는 결혼해서 너랑 못 놀아준다는 선전포고가, 우릴 움직였다.
종종 “결혼할 사람은 첫눈에 알아본다며?”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 내 대답은 한결같다. “난 못 알아봤는데?”
소개팅에 지친 30대 남자와 여자는 차분해진다. 예쁘다고, 멋있다고, 대화가 좀 통한다고, 뿅 가지 않는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을수록 서로에게 조심스럽다.
일요일 오전 11시, 지하철역 앞 카페에 들어섰다. 애매한 시간에 밥이 아닌 커피를 선택한 건. 서로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자는 의도였다. 사람은 한 번 만나서는 알 수 없지만, 한 번만 만나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도 예외일 순 없다. 누군가에게 나도 ‘낭비’로 느껴질 수도 있을 터.
“전 도착했습니다.”
카페 문을 열었다. 혼자 있는 남자는 세 사람이었고. 나는 단번에 나의 소개팅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사진과 똑같았다. 반면,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봤다. 사진 속 얼굴과 실물이 좀 달랐나 보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회사, 취미, 주선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금세 대화 주제가 떨어졌고. 둘 다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소개팅은 이쯤에서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밥 먹으러 갈까요?”
그가 물었다. 의외였다. 우린 둘 다 등을 의자에 바짝 붙이고,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망한 소개팅이었다. 그런데 밥이라니. ‘예의상’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괜찮아요. 제가 아침을 늦게 먹었거든요.”
손사래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있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 아뇨, 제가 아침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거든요.”
아? 아뇨? 어쩐지 그가 내던진 머리말이 이런 의미로 느껴졌다.
‘아, 아니, 네가 맘에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배고파서 그래’
나는 너무 당황해서, 피자를 접어 먹었는데
카페 옆 피자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조각 먹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대신해, 그가 나머지 7조각을 먹었다. 내 느낌이 정확했다. 그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
“제가 오늘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든든하게 배를 채운 그는 잠시 길을 걷자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더니. 10분쯤 걸었을까. 이내 저 말과 함께 인사하고 지하철역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게 2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카페에서 자리를 정리할 것이지. 피자집은 왜 가며, 산책은 왜 해? 나도 너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내가 먼저 너 마음에 안 들었거든. 의문의 1패를 당하긴 했지만, 일단 친구에게 소개팅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냈고. 그때 문자메시지가 왔다.
‘하루 씨,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역시 그의 문장에 ‘다음’이란 단어는 없었다. 질세라 나도 답장을 보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3일 뒤, 늦은 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지만, 눈에 익은 숫자들이었다. 아, 그 소개팅남! 근데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왜 전화를 한 걸까. 그가 내게 전화한 이유가 뭘까. 안면만 있는 사람이 전화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결혼’ 아니면 ‘판매’. 결혼은 아닐 테고. 설마 판매? 찜찜한 기분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잘 지냈어요? 전 지금 회사 마치고 수영장에 왔다가 집에 가는 중인데요. 와, 운동하고 나니까. 몸이 좀 풀리는 것 같네요. 그나저나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는 날 있어요? 밥이나 같이 먹죠.”
귀를 의심했다. 기억도 의심했다. 혹시 내가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 남자에 대한 중요한 기억을 잃은 건 아닐까. 쾌활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밥 먹자는 이 남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우린 또 만났다. 보통의 로맨스라면 이쯤에서 반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은 순서만 다를 뿐. 첫 만남과 똑같았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대화는 건조하고. 그러다가
“이제 집에 갈까요?”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또.
그렇게 헤어진 후. 그날은 연락이 없었다. 다음 날 점심때쯤에 짧은 문자메시지가 왔다.
‘맛점하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이날은 여기까지였다. 다시 연락이 온 건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는 또 밥을 먹자고 했다. 이때부터 궁금했다. 대체 이 남자 뭘까.
딱히 원하는 건 없지만, 매번 똑같으면 이상하더라
세 번째 만남도 딱 2시간 만에 끝났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바이 바이.
이쯤 되니 그의 정체가 의심됐다. 사정상 공개할 수 없는 애인(?)이 있다거나. 2시간 이상 이성과 함께 있으면 큰 화를 입는 저주에 걸렸다거나. 혼자 밥을 먹으면 극도로 우울해진다거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과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궁금증은 사랑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우리는 곧 연애를 시작했고. 나는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는 남중, 남고, 공대를 거쳐 남성 비율이 높은 직업과 직장에 다닌다. 취미는 낚시, 축구, 야구, 게임, 인라인스케이트. 특기는 무엇이든 깔끔하게 정리하기. 연애 경험도 있고, 대학에서 만난 여자 사람 친구도 있었지만, 이성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지. 또 어떻게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연애는 어렵단다.
첫 만남에서 일이 있어서 집에 간다고 한 건. 진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고. 밤늦게 전화해서 횡설수설하며 밥 먹자고 한 건. 친구의 피드백을 참고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 2시간 만에 헤어지고 문자를 보내지 않은 건.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고. 세 번째 만남에서 이야기 중에 일어나자고 한 건. 커피를 다 마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이 많은 음식점과 카페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릇과 컵이 바닥을 보이면 일어섰다. 다른 사람도 함께 이용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란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연애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언제부턴가 그는 카페에 갈 때면 가장 큰 사이즈의 커피를 주문하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번에는 진짜 천천히 마셔요.”
짧고 담백한 그의 말과 문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맛점해’
평일 오전 11시 50분. 각자의 일터에서 점심 메뉴를 떠올리는 시간. 남편은 내게 저 세 글자를 보낸다. 연애 때부터니까. 이제 5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따졌다. 성의가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점점 저 세 글자가 고마워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나를 생각하며 쓰는 저 짧은 문장에서, 한결같은 그의 마음이 읽힌다.
꿀팁 없는 글팁5
요약이 글약이다
요즘 조카의 글쓰기를 봐주고 있다. 내심 할머니 손에 크는 조카가 걱정됐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의 교육열은 어마어마했고. 그런 환경 속에서 엄마 정보력 없이 학교에 다니는 조카는 괜찮은 걸까.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지만, 뒤처지다 보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조카를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조카의 수학 문제집을 보던 중.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단순한 문제의 답은 정확했다. 그런데 문장이 긴 문제, 즉 천천히 꼬인 말을 풀어야 공식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많이 틀렸다. 그제야 나는 조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저번에 준 책 다 읽었다고 했지? 무슨 내용이야?”
“아, 그거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
“읽었다며? 읽었는데 왜 기억이 안 나?”
“내용을 알긴 아는데,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그래.”
글쓰기 과외는 이렇게 시작됐다. 숙제는 간단했다. 안데르센 동화책을 다시 읽고. 매주 한 편씩 5~10줄로 요약해서 보내기. 책은 꽤 두꺼웠지만, 동화 한 편은 길어야 15장이었다. 조카는 저항 없이 바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3주가 지나자. 힘들다고 칭얼댔다.요약해서 쓰는 게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요약한 글은 읽기는 쉽지만,쓰기는 어렵다.핵심을 잘 짚어내고, 군더더기 없는 기승전결을 만들고, 누구나 쉽게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 그 때문에 퇴고를 가장 많이 하는 글이기도 하다.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얘기.
하지만 요약은 글약이다. 요약을 잘하는 사람이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게다가 우린 짧은 글, 사진, 영상으로 메시지를 전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니 요약을 잘하면 유리한 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간단한 검색으로 요약하는 글쓰기에 대한 수많은 꿀팁을 찾을 수 있지만,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 내가 쓰는 ‘어쨌든 도움되는 요약 방법’을 소개한다.
<어쨌든 도움되는 요약 방법>
1. 일단 알맹이는 쏙 빼두기
: 기승전결 중에는 ‘기’와 ‘결’만.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중에는 ‘발단’과 '결말'을 먼저 작성한다. 글도 내비게이션과 같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이 있어야 움직인다. 처음과 끝을 정해두면, 알맹이가 되는 중간 이야기를 더 빠르게 정리할 수 있다.
2. 참고하지 말고 비교하기
: 잘 써지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이 쓴 글부터 읽는 습관을 만들면, 맨땅에 헤딩하기가 어려워진다. 일단 내가 먼저 쓰고 다른 글과 비교해 보는 걸 추천한다.내용을 요약하는 건. 생각을 정리 정돈하는 일이다. 쓰는 일을 미루고, 남이 쓴 좋은 글만 부러워하면, 백지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제가 요즘 그래요. 좋은 글을 많이 읽었더니 안 써집니다)
3. 감정은 좀 빼자
: 슬펐다, 아팠다, 불쌍했다, 부당하다, 무섭다 등. 요약 글에서는 개인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다. 상황과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우선이다.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독자의 몫이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내 글을 읽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