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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May 02. 2019

‘컨펌’과 ‘컨택’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글쓰기 팁7. 그림 같은 글임

  

  3일간 참았다. 목마름 현상. 화장실 가고 싶은 현상. 점심시간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등. 의식 흐름에 따랐던 행동과 마음을 모아 한 가지에 집중했다. 바로 '기획안 작성'이었다.

     

   그동안 기획안대로 진행된 일이 많지 않았다. 사공이 많은 회사였다. 오픈 하루 전까지, 아니 2시간, 1시간, 심할 때는 30분 전까지도, 바뀌는 게 많았다. 콘텐츠 세세한 부분은 물론 키워드나 메시지 같은 큰 줄기를 수정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각 부서의 담당자부터 대표님까지. 매번 각자 생각나는 대로 수정사항을 던졌다. 설득 타협 통하지 않았다. 덕분에 결과물이 엉망 때도 있었다.


대환장파티가 계속되는 회사에는 그 이유가 있더라

   자연스럽게 쨉실한 노하가 생겼다. 확정되지 않은 프로젝트 기획안 공들이지 않았다. 이번 일도 정해진 게 없었다. 그런데도 3일간 야근까지 자처한 건.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이번 일은 우리보다 하루 씨의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라고 생각해요.”     


  마케팅 부서 김 과장의 말이었다. 그렇다. ‘실력’이란 단어는 나를 긴장시켰고, ‘인정’이란 단어는 나를 자극했다. 결과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인정을 받는다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휴가가 더 생기는 것도 아니고, 파견직인 나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알면서도 열심히 준비했다. 자료를 찾고 또 찾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에게 슬쩍 보여주며 피드백까지 받았다. 오랜만에 나는 아주 완벽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 저, 저, 저기요. 지… 금 뭐하시는 건가요?”     


  기획안을 보낸 다음날 김 과장과 미팅이 있어 본사로 갔다. 일찍 도착부서 구석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성진 씨의 책상이 정면으로 보였고.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의 모니터에 지난밤 내가 보낸 기획안이 있었고. 시험지를 채점하는 것처럼, 빨간 글씨로 덕지덕지 수정되어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성진 씨에게 물었다. 지금 뭘 하고 계신 거냐고. 그러자          


  “김 과장님이 기획안을 좀 센스 있게 다 바꿔달라고 해서요. 이게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수정하고 있는 기획안의 작성자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빨갛게 물들어 있는 기획안 주인이 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진 씨도 파견직이었다. 어쩌면 그도 김 과장에게 ‘실력’과 ‘인정’ 따위의 단어로 버무린 요상한 말을 들었으리라.     


아니 그럼 전... 대체 왜 야근했던 거죠?

  자고 일어나서 붉은 펜으로 낙서된 얼굴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창피했다. 김 과장이 말한 ‘실력’이란 게 내게는 없던 걸까. 아니면 ‘인정’ 받을 기회를 놓친 걸까. 빠른 속도로 다른 사람에게 수정을 지시한 건. 내 기획안엉망이란 증거였다. 나는 예정된 패배자였다.   



    

  두통약을 먹고 미팅에 들어갔다. 그런데 김 과장은 예상과 달리 다정한 말투로 이렇게 인사했다.  


  “고생하셨어요. 기대 이상으로 잘 뽑아주셨더라고요. 정말 감사해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말입니다’하며 이 행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획이라 할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치아가 훤히 보일 정도로 미소 지으며    


  “하루 씨, 역시 실력이 있으시네요. 몇 가지만 수정하면 될 것 같아요.”        


  라는  아닌가.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자꾸만 사무실 구석에서 빨갛게 난도질되어 있는 기획안이 떠올랐으니까. 미팅이 끝날 때까지. 칭찬이 이어졌고. 수정사항도 많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어코 물어봐야 했다.          


  “근데요.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 왜 성진 님이 제 기획안 전체를 수정하고 있죠?”    


  김 과장의 동공이 커졌다. 입도 살짝 벌어졌다. 그 상태로 몇 초간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피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아, 저, 그, 그게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모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김 과장 당황했다. 공격하는 미소가 아닌데, 오해한 모양이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요. 성진 님이 잘하는 분이니까. 그분이 피드백 주신 내용이 있으면, 참고해서 알려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비꼬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으나. 김 과장은 보다 나은 결과물을 뽑고 싶은 욕심에 그랬던 것이고. 나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에 오버하였던 것이다. 두 욕심이 만들어낸 불편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노하우가 생겼다. 김 과장과 일할 때는 두배로 쨉실하게 굴기였다. 뒤끝 작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흥.     




  얼마 전 단편으로 구성된 <블랙 미러>라는 드라마를 봤다.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중 <추락> 편은 미래에는 SNS ‘별점’으로 사람마다 등급이 정해지고. 나아가 그 등급에 따라 삶이 제한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등급 때문에, 아파트 렌트비를 할인받을 수 없게 되자. 전문가까지 동원해 ‘별점’ 늘리기에 매달린다. 하지만 노력이 과했던 걸까. 그녀의 지나친 가식과 친절은 별점이 낮아지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고. 등급도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내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 경찰서 유치장씬이 인상적이다.

  극단적인 설정이지만, 우리 모습과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삶은 ‘초이스’의 연속인 것 같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수많은 ‘컨펌’과 ‘컨택’이다. 더군다나 ‘좋아요’가 돈이 되고 인기가 되는 세상 컨펌과 컨택, 즉 ‘타인의 인정’에 더욱 굶주리게 만든다. 나를 찾는 과정조차 누군가의 ‘좋아요’를 받아야만 힘이 되는 아이러니. 가끔 헷갈린다.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이,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이럴수록 우리의 선택권은 아주 쉽게 빼앗기는데도 말이다.         



꿀팁 없는 글팁7    


  그림 같은 글임     

 

  “저는…… 그러니까…… 작가인데요…… 소설을 쓰는…….”
  내 말을 들은 보험회사 직원은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시선을 떼 힐끔 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글쎄, 잘 모르겠다…… 소심한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보험회사 직원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아주 살짝, 비스듬히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작가라, 작가라…… 작가들은 보통 교통사고도 잘 안난던데…… 운전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여기 있네요. 작가. 작가는 일용 잡급에 해당하니까…… 일당 만팔천원이네요.”
  아하,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란 소설을 읽다가 피식 웃었다. 몰래 숨어서 저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보험사 직원이 ‘일용 잡급’을 운운할 때는 주먹까지 쥐어졌다.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정을 드러내는 문장이 적지만, 어쩐지 작가의 기분이 선명하게 와 닿는 글이 있다. 읽다 보면 상황이 그려지는 '그림 같은 글'이 그렇다.

 

  처음부터 '그림 같은 글' 써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묘사하는 글’을 자주 쓰다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나. 글로 쓰는 게 막연한 순간이 있다. 이럴 때는 먼저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써볼 것을 권한다. 그때가 언제였고. 날씨는 어땠고, 누군가와 함께였고, 무엇을 보았고, 어떤 소리를 들었고, 무슨 냄새를 맡았고, 어떤 생각이 들었고,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땠고, 이 일과 관련된 사회 이슈가 있는지, 또는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등. 최대한 많은 분량을 써본다.

     

  그냥 주절주절 쓰라는 건 아니다. 자세히 기록하면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다 쓴 후에는 강조할 부분, 줄여도 되는 부분, 삭제해도 무관한 부분, 다음에 다른 이야기로 쓸 부분으로 구분한다.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하고, 수정하고, 덧붙이며 글을 써본다.


   그리고 강조할 부분을 글로 옮길 때는 그림 그리듯 써보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자세히 묘사해 보자. ‘팩트’가 아닌 ‘상황 디테일’이 독자를 설득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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