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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May 09. 2019

나의 프리랜서 도전 폭망기

글쓰기 팁8 감성으로 쓰고, 이성으로 읽자

  

  “잡지사 프리랜서로 일하려고.”    


  방어에 나섰다. 퇴사 후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를 향한 인사가 ‘잘 지어?’에서 ‘회사는?’ ‘이직은?’ 따위로 바뀌었다. 나만 “식사는 하셨습니까?”가 “잘 지냈어?”와 같은 맥락이었다는, 먼 과거로 타입슬립 한 느낌이었다.  


  당시 내 나이 20대 중반, 몸뚱이 건장한 청춘이 어디로도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친구들조차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관심도 쌓이면 불편해지는 법. 대처랍시고 저런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프리랜서? 우와.”    


아무말 대잔치로 시작된 프리랜서 생활


  반전이었다. 말 한마디에 ‘부끄러운 청춘’에서 ‘부러운 청춘’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프리랜서’란 직업을 가진 친구는 없었다. 미지의 세계, 프리랜서는 자유와 돈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프리랜서 도전 폭망 4단계’는 이렇게 시작됐다. 프리랜서를 꿈꾸는 모든 새싹님이 이렇게는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썼다. 그래서 좀 길다.


(여기부터, 눈 아픔 주의!!!)   




첫 번째 폭망

노 머니, 갓 폐인, 고로 일단 돈이 필요함
 노 머니(No Money)
노 게인(No Gain)   


  잡지사 프리랜서로 일하게 된 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용돈이나 벌 생각이었다. 그런데 엉겁결에 저렇게 선언하고 나니. 새삼 이 일이 귀중했다. 잡지 한 페이지당 5~7만 원의 원고료를 받았다. 인터뷰, 취재, 기획기사 등. 첫 직장이었던 신문사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주로 손이 많이 가는 기사를 맡았다.


  예를 들면 ‘공원 같은 아파트’와 같은 기사는 한 페이지당 4곳 정도가 소개된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아파트는 20군데를 선정했고, 그중 절반은 현장 취재를 했다. 나머지 아파트도 사진을 요청하고 전화 인터뷰를 했다. 자료조사, 취재, 원고 작성까지. 대략 일주일이 걸렸다. 완성된 기사로 25만 원 정도 받았다.


  잡지사는 내게 3~4개 꼭지를 맡겼다. 많을 때는 100만 원, 적을 때는 80만 원 정도가 입금됐다. 한 달을 버티기에 넉넉한 돈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 혼자 독립해서 살고 있었다. 오피스텔 월세 50만 원, 관리비 10만 원, 인터넷, 휴대전화, 교통비, 식비, 보험료, 자동이체 적금 등. 매달 최소 100만 원은 필요했다.    


  일을 늘려야 했다. 밤마다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프리랜서 기자, 프리랜서 작가를 구하는 글만 보이면 이력서를 보냈다. 그러다 한 홍보대행사로부터 일을 받았다. ‘바이오’와 관련된 글을 매달 다섯 편씩 쓰기로 했다. 주제 선정도 나의 몫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나는 ‘과학’의 ‘과’ 자만 들어도 겁을 먹는 사람이었다. 막막했지만 ‘바이오’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월세 날’이 편해질 터였다.

  이 회사와는 한 달에 다섯 편의 글을 쓰기로 계약했고. 한 편당 A4 1매를 10포인트 글로 채우고 5만 원씩 받기로 했다. 매달 25만 원을 받게 된 셈이다. 실제로는 세금을 제외한 더 적은 금액이 들어왔다.    


  일이 더 필요했다. 이번에는 불교 잡지였다. 인터뷰 녹취록을 정리했다. 지인 찬스로 소개받은 일이었다. 금액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작았고. 딱 한 달밖에 하지 못했다. ‘급하다’라는 말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뜻했다. 그 후로 직원을 채용하고, 내게는 일을 주지 않았다. 한 푼이 아쉬웠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두 군데 일을 고정으로 맡았으나, 생활은 궁핍했다. 이사를 고민했다.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어둡고 좁은 골목을 여러 번 꺾어 들어가야만 하는 빌라 1층 원룸을 둘러봤다. 월세는 25만 원, 관리비는 6만 원이나 저렴했다. 31만 원을 아낄 수 있었다. 형편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지만 몸움직이지 않았다.


  갈등하는 사이 파산했다. 돈이 바닥났다. 자식이란 관계를 담보로 아버지께 무이자 혜택을 받아, 돈을 빌렸다. 월세와 카드값을 해결했다. 그러나 한 번 구멍 난 재정상태를 회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피스텔을 내놓고 본가로 들어가야 했다.     


  나의 첫 프리랜서 생활에는 자유가 없었다. 돈 때문이었다. ‘1인 가구’라는 귀여운 타이틀과 달리 고정지출 금액은 앙증맞지 않았다. 돈에 무지했다. 만약 그때 최소 6개월에서 8개월을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버티고 개선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나에게만 하루 48시간을 줬으면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투잡러의 한계     


  집으로 돌아온 후 공공기관 계약직으로 일했다. 이것이 나의 첫 계약직 직장생활이었다. 첫 직장에 비하면 월급이 적었다. 그래도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식비와 교통비도 절약니 살만했다.


  첫 달 월급으로 아버지께 빌린 돈을 갚고, 밀린 카드값을 갚고, 밀린 보험료와 적금을 내고 나니 0원이었다. 두 번째 달부터 돈을 만져볼 수 있게 됐다. 그제야 친구들을 만나는 여유도 생겼다. 나의 프리랜서 생활을 부러워하고 궁금해하던 그들에게 솔직 고백했다.    


  “생활비 때문에 사채를 쓴다는 사람들도 다 사정이 있는 거야.”    


  매달 돈이 들어왔지만, 직장생활 만족도는 전보다 떨어졌다. 비정규직으로 일해보니 ‘차별’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됐다. 예를 들면 ‘본업’ 외에도 ‘도우미’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왜 다과회를 하는데 떡을 나누고, 음료수를 준비하고, 행사장을 꾸미고, 뒷정리해야 할까. 그것도 행사를 준비하는 담당자와 비정규직 직원만 하는 걸까. 나는 온라인 콘텐츠 제작을 했고, 함께 동원된 승현 씨는 영상을 제작했고, 은지 씨는 홍보자료를 관리했고, 미정 씨는 비용 정산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잡다한 일을 맡게 된 우리들의 공통점은 ‘비정규직’이었다.

  언젠가 이에 대해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이런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누가 해요?”   


  대답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냥 웃었다. 그 순간 ‘투잡’을 해서 돈이나 더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국 돈이 이기니까.


  ‘글쓰기 과외’를 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5만 원을 내고 전단지를 붙여 고등학생 세 명을 모았다. 한 명당 15만 원씩 총 45만 원을 받고 일주일에 두 번, 2시간씩 과외를 했다. 사실 글쓰기 영역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부족한 나였다. 그렇지만 해보고 싶었다. 그 담당자가 말했던 ‘누가’는 ‘아무나’가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었달까.


   수업은 ‘결과’가 목표였다. 이론수업 없이 공모전 준비에만 몰두했다. 아이들이 공모전 주제에 맞게 글을 써오면, 생각 찾기를 위한 토론을 했다. 왜 이런 글이 나왔는지 묻고 또 물었고. 아이들이 서로 끝없이 질문하게 했다. 이렇게 ‘내가 하려던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낸 후, 글을 수정하거나 다시 쓰게 했다. 두 번째 글도 주장하는 메시지가 잘 담겼는지 이야기를 나눴고. 완성된 글은 내가 조금 다듬어서 공모전에 제출했다. 처음부터 좋은 결과가 있던 건 아니지만, 몇 달 후 나도 받아본 적 없는 ‘글쓰기 상’을 받는 아이들이 생겼다.    


  역시 이 바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어머님들이었다. 상을 받은 아이의 부모님이 중학생 두 명을 소개해줬다. 한 학생당 10만 원씩 받기로 했다. 이로써 학생은 다섯 명, 월급 외 추가 수입은 65만 원이 됐다. 초등학생 다섯 명을 방학 때만 맡은 적도 있었다. 수입이 두 배로 늘었다. 일주일 내내 퇴근 후 과외를 했다. 작은 내 방이 곧 학원이었다.  

  그러나 돈에 대한 기쁨은 잠깐이었다. 사람이 늘면서 불만과 요구사항도 늘었다.     


  “왜 우리 여빈이는 상을 못 받아요?”

  “이번에 00 공모전 있던데, 이것도 같이 준비해 주실 거죠?”

  “내일까지 학교에 독후감 제출해야 한다던데, 좀 봐주실 수 있죠?”

  “내일 중간고사가 있는데, 오늘 밤에 아이들 국어 좀 봐주실 수 있죠?”     


  회사에서 몰래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업무 시간 중에도 상담(?)을 원하는 부모님 전화를 받아야 했다. 회사와 과외 모두 집중력이 떨어졌다. 일이 정신없이 몰릴 때는 자꾸만 실수했다. 능력과 경험이 부족할 때는 더욱 부지런해져야 한다지만, 그때는 그게 어려웠다. 스트레스와 부지런함은 반비례했다.    


  결국, 이직 후 과외를 관뒀다. 과외로 벌어들이는 만큼의 돈을 더 주는 회사로 옮겼다. 다시 저녁이 있는 삶이 됐다. 후련하진 않았다. 몸이 편해질수록 찝찝한 감정이 짙어졌다. 계속해서 두 가지 일을 망친 실패의 원인을 곱씹었다.      


  현재 회사에 다니면서도 프리랜서 일을 겸했었다. 돈 욕심에 했던 건 아니었고 입사 전에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했던 투잡이었다. 경험이 늘어서인지 일은 어렵지 않았다. 실수도 줄었다. 그러나 ‘힘듦’은 여전했다. 출근하기 전, 퇴근 후, 그리고 주말까지.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끝내지 못한 일’이 신경 쓰여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럼에도 ‘투잡’에 대해 긍정적이다. 본업 외에 다른 일로 돈을 벌어보는 경험은, ‘까마득한 미래’을 준비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 믿는다. 우린 이미 ‘한 회사’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한평생’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변화는 언제든 찾아올 테고, 회사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또한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새싹 투잡에게 하고픈 얘기가 있다. ‘사이드 잡’을 선택할 때는 ‘메인 잡’보다 즐거운 일을 선택하길 추천한다. 몸도 피곤한데 일까지 재미없으면 힘듦이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폭망

월급도 무 자르듯 나눠 줬으면 좋겠어
정(情)에 속아
    정(丁)이 됐다     


  스물아홉 살에 퇴사하고 10개월간 여행을 떠났다. 미국, 멕시코, 홍콩 등에서 실컷 놀고 한국으로 돌아왔더니, 서른이 되었다. 나이가 차곡차곡 늘어가는 것과 달리, 통장은 처음 모습 그대로 ‘텅장’이 되었다. 다시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했다. 돈이 급한 상황이라 출근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회사의 ‘3개월간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런데 출근한 첫날,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하루 씨, 같이 일할 팀원들이랍니다.”

  “네?”    


  “프리랜서라도 직책은 있어야죠.”라고 말하던 이사님이 “대리 정도가 좋겠네.”라고 했었다. 처음 받아보는 직책. 그 의미는 이랬다. 내가 일하는 부서 파트에는 사원 두 명과 인턴 한 명이 있었다. 나는 그 파트를 관리해야 했다. 대리 나부랭이 주제에, 프리랜서 주제에, 3개월짜리 이방인 주제에, 매니저 역할이라니. 인사를 담당한 이사님께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멀쩡한 직장 관두고 나와서, 프리랜서니 계약직이니 하면서, 반백수처럼 살잖아. 어휴.”    


  그쯤 엄마가 이모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렇게 읊어댔다. 주어가 없어도, 부연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말 한 '반백수'가 나란 사실을.    


  회사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출근은 8시 30분까지였지만, 매일 아침 7시 50분에 회의가 있었고. 그 후에는 전 직원이 모여 체조를 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오면 8시 30분.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지만, 6시가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내가 일하는 팀은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야근 후에 회식도 잦았다.  

  게다가

        

  “팀원들 간식값은 매니저들이 내야죠!”    


  팀원들의 간식비를 대신 내는 날이 많았다.    


  “오늘은 매니저들이 팀원들 밥값 내는 걸로 하죠.”    


  팀원들의 점심값을 대신 내는 날도 꽤 됐다.         


  “술을 매니저들이 대신 마셔줘야죠.”    


  팀원에게 술을 권하는 임원이 있을 때 대신 술 마셨다.   


  나는 대체 누굴까. 나와 회사는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썸남에게는     


  “대체 우리 무슨 사이야?”    


  라고 묻는 게 어렵지 않지만, 회사에는     


  “대체 너와 나는 어떤 관계야?”    


  라고 묻는 게 쉽지가 않다.   


  첫 미팅 때 이사님은 “우리 회사는 정이 많아요. 인연을 귀하게 생각하죠. 프로젝트가 끝나면 정규직도 검토해 봅시다.”라고 속삭였다.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일해보니 절대 입사하지 말아야 할 회사고 확신했다. 생계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내 돈, 내 시간, 내 감정까지 쏟아붓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테다.     


  인연을 귀하게 생각하는 회사 덕분에 팀원들과 어색해졌다. 그들은 나의 업무 스타일을 실망스러워했다. 전해 들은 얘기로 내가 다른 매니저보다 어려서 기대가 컸다고 했다. 전보다 새롭고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거란 기대감도 있었단다. 그런데 막상 같이 일해보니 ‘현실 가능한 기획’과 ‘공수가 많이 들지 않는 기획’ 또는 ‘임원들이 좋아할 만한 기획’만 기계적으로 하는 모습이, 여느 상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했다.

  나로서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계약된 일을 하는 프리랜서였고, 팀원들은 회사에 소속된 직장인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했지만 끝내야 하는 지점이 달랐다.


  프로젝트를 끝낸 3개월 , 이사님이 ‘정규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일과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로 하혈을 하던 시기였다. 날짜에 맞춰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잘 나가는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 프리랜서의 위치는 갑을병정 중에서 ‘을’이 되는 것도 힘들 때가 많다. 그리고 간혹 ‘정(情)’을 빌미로 ‘정(丁)’을 만드는 회사도 있다. 이럴 때는 결론을 내야 한다. 일을 끝내고 입금이 확인되면 더없이 친절하게 이별하거나. 그래도 아쉬운 건 내 쪽이란 생각으로 계속 함께하거나. 전자는 내 선택으로 끝나지만, 후자는 회사 선택으로 좌지우지되겠지만 말이다.         




네 번째 폭망

나도 입금되면 달라질 수 있는데
  입금은 지연될 수 있지만,
        인내심은 지연될 수 없었다       


  다시 출근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구했다.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교육 영상 구성안을 쓰고, 박물관 도슨트 대본을 쓰고, 기업 홈페이지 리뉴얼에 필요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고, 대필 작업도 했다. 건당 10만 원에서 150만 원까지. 금액은 모두 달랐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일을 진행하기도 하고. 어떤 일은 훗날을 기약하며 '공짜'로 맡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입금 지연’이란 생소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됐다. 약속한 날짜에 돈을 입금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의외로 입금이 지연되는 회사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하하하. 담당자님, 잘 지내시죠? (…) 저, 그런데요. 죄송한데요. 돈은 언제쯤 입금이 될까요?”    


  라고 해야 했다. 내 돈 받으면서 '죄송'과 '미안'이라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입금’ 외에도 이상한 일이 계속 벌어졌다. 급하다며 스케줄을 비워두라고 하더니,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한다거나. 기획안까지 받아놓고, 갑자기 내부에서 진행한다고 통보한다거나. 후자의 경우 내가 제출한 기획과 비슷한 콘텐츠를 제작된 일도 있었지만, 한 마디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내게 일을 줄 수도 있으니까.


  점점 기다리고 참아내는 인내심이 사라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어그러졌다. 결국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게 불편하면서도, 막상 혼자 살아가려니 불안하고 초초했다. 프리랜서는 인내심과 믿음이 필수다. 일을 하면서도 다음 일이 사라질까 불안하고, 잠깐 쉬는 중에도 편안하지가 않고, 가끔은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모래알처럼 쓰러지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러다 보면 좋은 날이 올까? 이건 아직 확인해보지 못해서 대답할 수 없다.          



꿀팁 없는 글팁8 


감성으로 쓰고
 이성으로 읽자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한 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랑이 끝나도 내일이 온다는 것이다. 연인과 헤어진 다음날이라고 예외는 없다. 아침이면 출근을 해야 하고, 밀린 업무를 끝내야 하고, 급한 은행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보험도 갱신해야 하고, 퇴근하고, 회식하고, 부장님의 아재 개그에도 방긋 웃어줘야 한다. 내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일상이라니. 나는 이별보다 이 사실이 아프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밤은 밤이었다. 은은한 조명을 켜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다시 이별한 연인이 떠올라 마음이 구겨졌다. 이 기분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눈물도 고였다. 이쯤 되면 후회할 짓을 고민한다. 전화할까? 다시 만나자고 할까? 그러다 상대가 먼저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오면, 헤어져야 했던 백만 가지의 이유는 사라지고.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는 한 가지 이유에 집착했다.


  감정이 촉촉해지는 밤은 글쓰기 좋은 시간이다. 쓸만한 이야기가 생각나고, 기분과 감정을 표현할 수만 가지 단어와 문장도 떠오른다. 내일이면 안개처럼 사라질지 모를 것들을 글로 옮겨놓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이럴 때 쓰면 짧은 글이건, 긴 글이건 후딱 써지는 마법도 종종 일어난다.


  덕분에 부작용도 있다. 밤에 쓴 글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격하게 기분대로일 때가 있다. 그래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은 주로 밤과 새벽 사이에 탄생한다. SNS만 살펴봐도 그렇다. 어둠이 깔린 시간에는 감성 원액 100%가 담긴 글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감성 돋는 밤에 초고를 쓸 경우,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는 게 어떨까.  


  첫 번째는 밤에 완성한 초고는 꼭 낮에 퇴고하자. 감성이 밤을 지배한다면, 이성은 낮을 장악 한다. 글은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글쓰기 초보자는 더욱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면 한다. 감성으로 쓰더라도, 이성으로 고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되도록이면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문장의 경우는 길면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 형용사와 동사를 줄이고, 일단 딱딱하고 짧은 문장으로 내가 하려는 이야기로 전진해야 한다. 어떻게든 꼭 쓰고 싶은 길고 긴 아름다운 문장은 따로 메모를 해두고, 퇴고할 때 곁들일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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