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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Jul 31. 2020

이별에 앞서 정산해야 할 것들 (1)

이미지 출처: 영화 <소공녀>



 가난한 연애를 했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에 만난 그는 서른셋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턴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만난 그는 무명작가였는데. 운명인지 얻어걸린 건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는 그의 작품을 읽었던 난, 심지어 작품을 아주 매력적으로 느꼈던 난, 그가 나만 알지도 모를 작품을 쓴 작가란 걸 알고 묘한 감정에 빠졌다.


  훗날 돌이켜보니 동경이었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갖고, 내가 해내지 못한 걸 해낸 사람에 대한 동경. 그런 묘한 감정은 쉽게 경계를 무너트렸으므로 순식간에 연인이 됐다.     


  한 톨의 이성도 첨가되지 않았던 연애는 좀 고단했다. 인턴을 끝낸 후 과외하며 매달 30만 원을 벌던 나와, 강의하면서 매달 70만 원씩 입금받는 그. 둘이 합쳐 딱 100만 원. 여기에 각자의 생계비용을 제외하면 데이트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벼룩의 간보다도 적었다.


  어쩔 수 없이 여름에는 다른 커플보다 더위를 많이 탔고, 겨울에는 주변 연인보다 추위에 떨어야 했다. 카페 대신 도서관, 파스타 대신 떡볶이, 술집 대신 편의점 앞. 돌아서면 서로가 보고 싶던 연애 초기에도 얄팍한 주머니 사정 탓에 암묵적으로 만남 횟수를 정했다. 생일이나 기념일이 다가올 때면 각자 집에서 밥을 챙겨 먹고 만났고. 식사 시간이 돌아오기 전에 헤어졌다. 아껴야 아낌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이.


  10년도 더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자존심이 센 그와 개인주의가 강한 내가 할 수 있는 연애는 아니었다.      




나는 취업을 했다.


   계절에 민감 연애가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둘이 합쳐 벌던 돈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을 월급으로 받게 됐다. 그때쯤 그는 강의를 관두고 새로운 작품에 몰입했다. 그러니까, 수입이 0원이 된 것이다. 순리대로 데이트 비용 대부분을 내가 부담했다. 처음에는 해줄 수 있는 게 많아져 뿌듯하고 기뻤다. 도서관 대신 카페로, 떡볶이 말고 파스타 집으로, 편의점 옆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는 미안한 얼굴로 따라왔으나 결국에는 '맛있다' 또는 '대박!' 같은 감탄사를 해댔다. 모든 게 나아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그때는 몰랐다. 아끼지 않고 아낌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이. 그런 사이가 연애를 위태롭게 만들 게 될 거란 걸.      


  점점 편안한 것에 익숙해졌다. 친구들과 아는 언니 오빠들 모두 직장인이 되었다. 더는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로 먹거리와 놀거리를 정했고, 쫓기듯 시간에 맞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사람도 없어졌다. 내키면 막차가 끊겨도 택시를 타겠다는 마음으로 금요일과 주말을 신나게 즐겼다. 아끼고 아까워하는 것들이 사라진 일상. 아무리 아닌척해도 소소한 것보다 충분한 것이 더 좋았다. 솔직히.       


  그렇게 반년이 더 흘렀을 때쯤. 커플 모임에 그를 데려갔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한 커플씩 돈을 냈는데, 마지막 장소였던 칵테일 바가 하필이면 우리가 계산할 차례였다. 그에게 낼 돈이 없단 걸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내가 낼 작정이었다.


  한데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계산대로 함께 간 그가 내게 계산서를 쓱 건네고, 뒤로 빠지자 짜증이 돋았다. 모임이 있기 얼마 전 한 친구가 내게 “네가 물주냐? 당장 헤어져.”란 말도 들었던 터라, 하필이면 그 친구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터라, 자존심이 깨져버렸다.

     

  “오빠가 낼게.”

  “에이. 아냐. 내 친구들 만난 건데 내가 낼게.”     


  미리 이런 대사를 써서 그와 공유할 걸 그랬나. 유치한 후회가 밀려왔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 게다가 택시정류장은 길게 늘어선 줄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예고했다.      


  “우리 차 타고 가. 내려줄게.”      


  그때 한 친구가 우리 커플에게 와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취해서인지 창피해서인지 기분이 나빠진 난 거절할까 했지만, 피곤한 금요일이라 차를 얻어 타기로 마음먹고 그의 귓불에 이렇게 속삭였다.      


  “오빠, 지은이 차 타고 가자.


  그러자 그는 난색 하며 큰 목소리로 친구에게 이렇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저희 내려주시면 엄청 돌아가야 하고, 그건 민폐인 것 같아요.”     



우리 둘만 지저분한 유흥가 거리에 남겨졌다.


  어쩐지 화난 얼굴이 되어버린 내가 택시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하자. 그가 갈 곳이 있다며 팔을 잡아끌었다. 따라가 보니 24시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내게 먼저 2층에 올라가 있으라던 그는, 잠시 후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아주 해맑은 얼굴로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세 시간만 있으면 지하철 다니니까. 잠깐 눈 붙이고 있어. 내가 깨워서 데려다줄게.”     


  그때였던 것 같다. 이 연애가 결말로 질주하고 있단 예감을 한 것 말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최대한 못된 얼굴로. 아주 경솔한 목소리로.     


  “나한테 민폐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다음 편에서 계속)






  겉보기에는 드세 보이지만, 순식간에 제압해 죽여버린 날파리를 휴지에 곱게 눕혀 보내주는 인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도 뻔한 거짓이 진실이 아닐까 기대하는 바보. 열렬히 누군가를 미워하겠다고 마음먹고도 금세 미움이 무너지는 호구. 아직도 누군가와 헤어지고 미워지고 멀어지는 게 참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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