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자아를 안고 산다는 안도감
아…… 그그그게 아니라 내내 마말은 그게…….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쥐방울만 한 녀석이던 시절. 난 늘 말을 더듬었다. 유치원생일 땐 그럭저럭 넘어갔다. 한데 초등학생이 되고 나선 예의 주시하는 어머니 시선을 자주 느꼈다.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거나, 가정환경에 의한 심리적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유전적 영향이 컸다.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자꾸 말이 꼬이는 아버지를 보며 내린 결론이다.
지금이야 아이에게 언어 발달장애가 감지되면 병원을 찾지만, 30년 전엔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내 자식 얕잡아 보면 어쩌나. 새까맣게 마음을 태우며 걱정할 뿐이었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안타까운 건 그녀의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가 아니었단 사실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곧잘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말 더듬는 게 창피해 목소리는 작고 말은 짧았다. 게다가 의견을 말할 때는 중도에 포기해 버렸다. 다소 예민하게 상대 눈치를 살폈고,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쭈뼛대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나는 ‘조용한 아이’란 캐릭터를 굳어졌다. 시간이 흘러 말을 더듬는 증상이 사라졌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용한 팔로워. 대학 때도 나서는 게 체질이 아니라며, 의견을 개진하는 걸 피하곤 했다.
한결같이 유지해 온 모습에 파동이 일어난 건 ‘취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어쩌다 보니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은 직업이었다. 딱히 대단한 심리전이 필요한 취재를 하진 않았으나. 대화를 주도하는 데 능숙한 이들과 마주 앉았다. 예상대로 다른 신입 기자와 비교하면 취재원에게 휘둘릴 때가 많았다. 당연히 상사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 없었다. 대체 나란 인간은 왜 이 모양일까. 자책하면서도 선뜻 지금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겠단 결심을 하진 못했다. 일희일비하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 후 몇 번의 이직으로 직업이 바뀌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업무가 많다. 시간이 흐른 탓일까. 대화 중에 우왕좌왕하는 일도 줄었고, 이런 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우도 거의 없다. ‘조용한 팔로워를 자청하던 아이’는 ‘상황에 따라 할 말은 하는 어른’이 되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업무 관련 통화를 몇 차례 할 일이 생겼다. 두 명의 친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너 아닌 것 같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넌 어쩜 변한 게 없이 똑같니’란 얘기를 들을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 그녀들이 말한 ‘너 아닌 것 같은 너’와 ‘변함없는 너’에 대해 곱씹어봤다. 아직 친구들이 보지 못한 모습도 수두룩 하단 걸 깨달았다. 환경, 상황, 사람 등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그것 중 부끄럽고 창피한 모습도 있으나, ‘이건 내 모습이 아니야’라고 부정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진짜 가짜 없이 모든 게 나였다.
정신분석이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선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에 꿈틀대는 욕구를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한데 무의식 세계란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뿐더러, 알아차린 후에도 애써 무시하는 때도 많다. 보이지 않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찌 쉽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꾹꾹 눌러도 무의식은 의식의 세계로 연결되어 버린다. 그 연결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사람은 성장하며 ‘멀티 페르소나(다중적 자아)’를 갖게 된다. 이것들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 남들이 느끼고 있는 나, 내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인해 나뉘고 쪼개진다. 한때는 ‘멀티 페르소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었으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페르소나’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페르소나’는 나의 대변자인 셈이다. 다다익선. 난 나를 지지하는 대변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단 사실에 자주 안도한다.
한결같은 사람이 된다는 건, 여러 페르소나의 타협과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늘 준비되어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페르소나를 맞이할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