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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May 30. 2017

알부잣집 딸

따분한 5일 차

  
 처가집이 부잣집이에요.”


  누군가 처가에 관해 물으면, 남편은 꼭 저렇게 대답한다. 그의 말이 농담도 거짓도 아니지만, 내가 진짜 알 부잣집 딸이지만, 그 의미와 과정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설명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늘 생각해왔다. 태어날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알잣집 딸’이란 수식어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보리라.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느닷없이 사업이라니  

   

  이 이야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작년에 환갑을 맞은 아버지가 대학생이던 35년 전. 사법고시인지 행정고시인지 아무튼 어떤 시험에서 떨어져 참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차가운 단칸방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던 아내와 아이(지금의 오빠)를 보며 시작됐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뭐라도 해야 해. 뭐라도.’    


  아버지는 직장생활 경험도 없이 사업부터 시작했다. 부자도 아니고. 대학교, 대학원, 국가고시 등. 꽤 오랜 시간 공부만 했던 가난한 모범생이 느닷없이 사업이라니. 어머니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의외로 쉽게 아버지의 결심을 따랐다. 큰 외삼촌이 하던 사업을 하겠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불안감이 덜했으리라.

  알 부잣집의 운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도시 속 시골아이

    

  내가 왜 ‘부잣집 딸’인지. 여기까지만 읽고도 이미 그 답을 찾아낸 분들이 있을 거다. 그렇다. 나는 진짜 ‘부잣집 딸’이다. 아버지가 양계장을 운영하시니까.   

  그런 탓에 나는 도시에서 자랐지만,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고 다음 해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양계장 옆에 임시로 지어진 집에서 자랐다. 아무것도 없는 산자락 밑에 지어진 그곳에는 우리 가족, 그리고 양계장 직원으로 일해주신 분들까지. 총 6가구가 모여 살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시골의 작은 마을과 비슷했다.

 

  농사도 그렇고 농장도 그렇고, 새벽부터 밤까지 할 일이 참 많다. 기술이 발전된 지금은 ‘많았다’라는 과거형이 정확하지만. 아무튼 그땐 새벽에 일어나 닭장으로 가서 달걀을 걷고, 그것 중에서 금이 생겼거나 깨진 건 버리거나 우리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저울에 올려서 무게와 크기별로 나눠서 담는다. 단순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손과 노동이 필요한 일이었다.

 

  작은 마을의 모든 어른이 종일 달걀과 씨름하는 동안, 또래의 아이들은 모여서 매일 뒷산으로 향했다. 산속은 멋진 놀이터였다. 어떤 날은 산딸기를 따고, 또 어떤 날은 나무를 타고, 또 어떤 날은 토끼를 따라다녔다. 겨울에는 서바이벌 눈싸움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던 한 가지. 새벽이면 일어나 일하러 나간 부모님과의 추억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새벽에 일하기 위해 나가면, 얼마쯤 후에 나는 꼭 잠에서 깼다. 그리고 부모님이 없는 이부자리를 볼 때면 늘 울어댔다. 뻔히 반대편에 오빠가 누워서 자고 있었지만, 무섭다고 울어대며 결국 아무 신발이나 신고 부모님을 찾으러 나갔다. 닭이 울어대는 양계장 안에는 여러 개의 긴 복도가 있었는데, 달걀을 걷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내, 셔츠의 아래 부분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졸졸. 일이 끝나기 전까지 따라다녔다.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꼬맹이 참 성가시고 귀찮았을 텐데. 부모님은 한 번도 나를 혼낸 적이 없었다.  



      

 부잣집 가족의 변화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우리 가족은 아파트촌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는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아버지 혼자 양계장으로 출근했다. 나는 더 이상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부모님이 없다고 울고불고하지 않아도 됐다. 집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가끔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아버지의 셔츠를 움켜잡고, 양계장 안을 따라다니던 그 새벽을 그리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사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나는 어린아이답게 그것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아파트촌은 그 작은 마을과는 달랐다. 산딸기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무 대신 놀이기구를 타고. 토끼 대신 애완견 강아지를 따라다녔다. 겨울이면 아파트 주차장에서 나무 대신 자동차 사이에 몸을 숨기며, 눈싸움을 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자 가끔 아버지의 양계장에 가는 것이 불편해졌다. 많은 핑곗거리가 있었지만, 아마도 난 양계장의 냄새와 닭이 울어대는 소리가 싫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양계장에 가지 않게 됐다.    

  생활과 환경은 갈수록 안락해졌다. 그 뒤에 몇 번의 이사를 더 했는데, 집을 옮길 때마다 더 크고 좋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러나 난 몰랐다. 왜 내가 이런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지. 난 그저 남들도 다 이렇게 사니까. 나도 이렇기 사는 줄 알았다. IMF가 오기 전까지.     




 그 시절 다들 힘들었지  

   

  원래 부모는 자식에게 경제적인 문제를 잘 털어놓지 않는다지만, 우리 부모님은 유독 더 그랬고, 나는 유독 집안 사정에 무관심했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언제부턴가 부동산업자가 우리 집에 사람들을 끌고 방문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난 그것조차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우리 가족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 건. 지하철역과 친구들이 있는 아파트촌을 떠나,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동네의 작은 월세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였다. 그때야 눈치를 챘다. 아, 아버지 사업이 많이 힘들어졌구나. 그때가 IMF 절정기였다.   

  대부분 가정이 그랬겠지만, 그 시기에는 모든 가족이 힘들었다. 어머니도 일을 구해서 다녔고, 나는 인테리어 소품 가게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며 스스로 용돈을 벌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지만, 소소한 재미와 낭만을 느끼기에는 바빴던 것 같다. 물론 많은 친구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렇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당시 회사에서 내몰리고, 사업이 위태로워진 아버지들이었으리라.     


  그래도 그때는 노력이란 놈이 크게 배신하지 않던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의 사업이 호전되어, 월세로 살던 그 아파트 단지에 집을 살 수 있었다. 부모님은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 내가 가끔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지 않아?”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됐다. 됐어. 여기서 쭉 살다 갈란다.’ 하고 받아친다.


  그리고 그사이,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오랜만에 찾아간 아버지 양계장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다른 도시로 이사한 양계장 안에는 달걀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의 손이 필요했던 고된 노동을 기계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제 양계장은 가족 단위가 아닌, 외국인 직원 2명이면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자, 지난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가족과 친구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버지께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수 없었다.   


        



  위기는 직선이 아닌 굴곡으로 온다    

  위기는 일직선이 아닌 커다란 굴곡을 치며 인생을 관통한다. 물론 나도 이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전처럼 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안심하려던 찰나. AI가 찾아왔다. 처음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던 해는 다행스럽게 문제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AI는 매년 더 큰 문제로 양계사업을 위협했다. 결국, 아버지의 양계장도 AI를 피해갈 수 없었다. 3년 전 아버지 농장 근처에 있는, 오리농장에서 AI가 발견됐다. 어쩔 수 없이 양계장 안에 있는 멀쩡한 닭들도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상금이 나왔다. 그러나 그 돈 역시 세금과 사업장에 대한 규제가 까다로워지고 있던 탓에, 낡은 시설을 재정비하는데 써야 했다. 보상금으로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서 말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다시 양계장을 운영하려 했지만, 또 근처 농장에서 AI 발생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양계장을 다시 닫아야 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경제활동을 오랜 시간 동안 하지 못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굴곡진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 시설 정비를 더욱 완벽하게 끝내고, 양계장에 닭을 채워 넣으려던 때, 또 AI가 터졌다.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이야기하면, 당시 대통령이 탄핵으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매년 더 심각해지는  AI에 나서서 대처해야 했다. 무능함 그리고 늦장으로 인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아버지 양계장에 넣기로 되어 있던 닭들도 땅에 묻히게 됐다. 그렇게 또 몇 달을 양계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켜만 볼 수 없던 난, 일단 서둘러 회사에 부양가족으로 부모님을 넣었다. 나는 프리랜서로만 일하다가, 결혼 후에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이 쉽지 않아, 늘 힘들고 후회됐지만, 이때만큼은 내가 이렇게 일하고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알 부잣집으로   

  

  드디어 2주 전. 다시 아버지의 양계장에 닭 냄새가 진동하고 닭의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할 수 있어, 얼굴빛이 전보다는 좋아졌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선 불안한 마음이 컸다. 예전과 다르게 큰돈이 들어가는 굉장히 불안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족을 위해 공부와 시험을 포기하고, 반평생 적성과는 무관한 사업을 하며 살아온 아버지에게 불안감을 내보일 순 없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해야 할 일은 소소한 응원이었다. 가끔 양계장에 찾아가 도와드리고, 맛있는 점심을 사드리는 그런 소소한 응원.     


  얼마 전 남편과 아버지의 양계장에 다녀왔다. 최근 허리를 다친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새로 들어온 외국인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아직은 다시 시작하는 시기라,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우왕좌왕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일을 도왔다. 기계 옆에 서서 기계가 걷어온 계란을 살펴보며 흠집이 있거나 깨진 것을 선별했다. 특별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서 하는 일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리는 붓고, 발바닥은 아프고, 정신이 혼미했다. 단순노동이라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미처 몰랐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오래된 수식어  

  

  우리에게는 이름 외에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리고 수식어들은 재능, 직업, 직장, 결혼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가장 오래된 수식어는 비슷할 것이다. ‘누구네 딸’ 그리고 ‘어느 집 아들’이란 것들. 그것들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계속 우리의 인생을 따라온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건 나란 사람 하나만 온전히 평가되어 탄생한 수식어일 거다. 그러나 어쩐지 불편하면서, 애잔하고, 듣기 싫은데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는 수식어는, 가족과 부모님에 의해 붙여진 것들이 아닐까.

  나란 사람을 따라다니는 ‘부잣집 딸’이란 수식어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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