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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Jul 11. 2017

100번째 불합격

따분한 7일 차


  퇴사를 고민했지만, 이직을 고려하진 않았다. 그래서 가끔 날아오는 헤드헌터의 이직 제안에 이력서를 보내지 않았었다. 뻔한 과정이 싫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그러다 지치고.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이게 진짜 내 인생일까.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될까. 어떤 회사를 가더라도. 결국, 결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하면서도 이직을 고려하진 않았었다. 나에게는 틈이 간절했다. 돈을 벌면서,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을 할, 그런 틈.   




  “우리 회사 채용공고에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 회사로부터 이 제안받았다. 헤드헌터가 아닌, 본사 인사팀에서 직접 연락을 해 왔다.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그런데   

    

  “인사팀에서 직접 채용 사이트와 인터넷을 검색해서, 지원해 주실 분들을 선정했습니다.”    


  응? 이런 경우도 있나? 싶었다. 규모가 큰 회사는 채용공고만 내도 많은 지원서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이유가 뭘까.   

 

  “알아보니까. 글 쓰고 콘텐츠 만드는 분들이, 이직도 자주 하고, 또 경력이 있으신 분들은 회사로 매일 출근하는 걸 선호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경력에 맞는 분들을 저희가 직접 찾아서 연락드렸어요. 오시게 되면 일주일에 2~3일만 출근하는 시간선택제로 일하셔도 됩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2~3일’이란 말만 내 귀에 들어왔다. 어쩌면 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벌면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할, 그런 틈.  


  최근, 내가 일하는 팀을 관리하는 본사 직원들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업무방식도 바뀌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다. 9 to 6. 본인들은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 퇴근하는 것이 직원의 권리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파견 업체 소속인 내게는 오후 4시 30분, 오후 5시, 심지어 연차를 쓴 날까지. “당장 내일 오전까지 부탁해요.”라는 말과 함께 업무를 지시했다. 뭐든 익숙해진다고. 처음에는 "미안해요."라는 말이 붙더니. 갈수록 당연한 상황이 됐다. 점점 주말에도 집에서 일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항의하는 것이 머쓱할 정도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점차 이런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는 틈을 생각하고, 퇴사까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직 제안을 받던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묵혀놨던 이력서를 꺼냈다. 몇 가지 내용을 수정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 회사로 이직하고 난 후를 상상했다. 만약 3일만 출근하게 된다면, 나머지 2일은 무엇을 할까? 사방에 책이 널린 도서관과 서점에 가고, 빈 좌석이 가득한 평일 극장을 즐기고, 사라진 굴곡을 찾는 운동을 하고,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야지.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평일이 생긴다면…. 정리된 이력서를 인사팀 담당자에게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축하합니다. 최종 면접만 보면 되겠네요."


  얼마 후. 서류와 포트폴리오가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이 남았지만, 벌써 합격한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혼자 '이런 퇴사 스토리 참 괜찮네!' 싶었다. 이런 퇴사 ‘해피엔딩’에 속한다. 회사에 불만이 많던 직원은 다른 회사로 가고, 하나의 도구를 잃은 회사는 또 다른 도구를 구하면 되니까. 누구도 감정이 상할 일이 없다.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이 있을까.

  나는 이렇게 혼자 온갖 종류의 김칫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김칫국물이란 사실은 면접장에서 깨달았다. 최종이라던 면접은 나를 포함해 8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긴 회사 차원에서는 이것이 더 합리적이었을 거다. 더욱 다양한 사람 중, 조금이라도 더 자신들과 맞는 사람을 뽑는 것. 이것이 당연한 절차란 거 이해한다. 그렇지만 연차를 쓰고, 1시간 넘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발가락이 아픈 하이힐을 굳이 꺼내 신었던, 나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뭐랄까. 썸 탔던 남자에게 사실은 어장관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그때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는 이 회사와 인연이 닿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순식간에 무거워졌던 마음이, 또 순식간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래. 마음에 없는 말로 잘 보이려 하지 말고. 할 수 없는 걸 하겠다고 얼버무리지 말고. 지나친 요구에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회사가 본인들 손으로 찾아낸 지원자들을 재고 따질 때. 나도 좀 이 회사에 대해 평가해 보자.     




  “5일 출근이 기본이지만, 원한다면 2~3일 출근하는 시간제도 선택 가능합니다. 어떤 형태로 일하고 싶으세요?”

  “3일 정도 출근하는 시간제 근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할 일이 좀 많을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업무라면 해야죠.”    


  “3일 정도 출근해서 괜찮겠어요?”

  “회사에 대해 알아가고 공부하려면 좀 빠듯할 수 있지만, 이런 경험이 충분하기 때문에, 잘 조절해서 할 수 있습니다.”    


   “우린 참신하고 새로운 걸 원해요.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는데, 3일로 가능할까요?”

   “최선을 다 해야죠. 한 가지 말씀드리면, 참신하고 새로운 건. 회사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툭, 하고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3일은 짧지만, 다양한 기획을 제안할 자신이 있습니다.” 

   

  면접관은 총 세 명. 그중 가운에 임원으로 짐작된 중년의 남자는 내가 저렇게 대답할 때마다 미간을 찡그렸다. 아마도 ‘상황이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5일 모두 출근하겠습니다’ 같은 대답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원했다. 그렇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전에도 잘 보이려고 던졌던 말 때문에, ‘3일 출근’이란 채용공고를 냈던 회사에 입사해 그만둘 때까지 ‘5일 출근’을 했기 때문이다.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나는 솔직해야 했다.




  3일 뒤. 메일이 도착했다. 정중한 문장들로 채워진 불합격 소식이었다. 마지막은

   

 '면접에서 보여주신 경험과 전문성, 그리고 넘치는 열정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라는 글로 마무리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왜, 도대체 왜. 경험, 전문성, 넘치는 열정이 있는데, 왜 떨어진 것일까.       




  불합격 메일을 받은 날. 또 갑작스럽게 던져진 업무로 새벽까지 일했다. 그리고 다음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9시에 출근해 책상에 앉았다.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선명했다. 가만히 앉아서 이것이 내 인생의 몇 번째 불합격인지 헤아렸다. 하나, 둘, 셋…. 기억을 더듬으며 손가락을 하나둘 접다가 금세 포기했다. 어차피 셀 수 없이 많을 테니까. 그냥 ‘100번째 불합격’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 두 번도 아니고, 후회 없이 할 말을 다 했지만, 어찌 되었건 불합격의 맛은 늘 그렇듯, 가루약처럼 쓴맛이 나며, 그 맛은 물로 헹궈도 바로 사라지지 않고,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그 여운과 함께 남은 궁금증. 과연 최종합격자는 일주일에 몇 번을 출근하겠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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