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루 Aug 30. 2017

쓰이기 위해 쓰다

따분한 8일 차

 나의 은밀한 '자기소개서'를 공개합니다


 - 자 기 소 개 서 -


  방금 3,000자를 꽉 채웠던 자기소개서를 지웠습니다. 전부, 모두, 싹 다 지웠습니다.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쓴 문장을 지운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금 이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쓰는 사람이 몇 명일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예상 인원을 헤아리다 보니, 어림잡아도 300명은 넘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영화나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이는 건,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결정적 사건이라던데…. 구구절절 쓴 나의 자기소개서는 몰입은커녕 하품이 쏟아집니다. 내가 어떤 가정에서, 어떻게 자랐고, 또 어떤 학교와 회사에서 얼마나 평범한 노력을 해 왔는지에 대한 얘기가 전부니까 당연하겠죠. 모든 조건이 평균에 닿지 못하는데, 이런 내용까지 곁들였다가는 투명 이력서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다 지웠는데, 이제부터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고민되네요. 어차피 결정적 사건이 없는 스토리라면, 솔직하기라도 해야겠죠?


  그렇다면 저는 솔직한 얘기를 써보겠습니다. 아주 만약에라도! 천재지변으로 합격하게 됐을 때! 만날 수 있는 이하루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처음 출근하는 날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갈 겁니다. ‘유행타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백화점 점원의 말에 혹해서 샀던 비싼 정장인데요. 역시나 8년이란 세월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더군요. 보시면 패션 감각이 없다고 느껴지실 겁니다. 혹시나 면접에서 저를 보셨다면, 네! 같은 옷, 맞습니다.

  인사를 드릴 때는 경청하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 상대의 이름을 한 번씩 읊조려 볼 텐데요. 아마 1주일은 넘어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겨우 외우게 될 겁니다.  

  패션 감각도 명사 암기력도 꽝이라 실망스러울 수 있는데요. 걱정 마세요. 제가 단점보다 장점도 많거든요. 그리고 사실 패션 감각은 업무와 상관없잖아요? 그러니 단점에서 빼주세요.


  경력과 스펙으로 따지면, 전 B급 콘텐츠 기획자입니다. 그런데요. 그거 아세요? 요즘은 B급이 대세란 거. 그리고 A급이면서 다방면으로 잘하는 기획자는 구하기 힘들어요. 차라리, B급에 다방면으로 쓸모가 많은 기획자가 가성비로 따지면 최곱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누리고 싶어하는 회사의 본심, 압니다. 그렇다면, 고객에게 가격보다 품질을 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회사도 개인의 능력부터 살펴봐 주세요. 붙어 있는 가격(학교, 전 직장, 직급)보다 업무 품질이 뛰어난 인재들이 많거든요. 공평한 성장의 기회는 이렇게 시작되는 거잖아요.


  마지막 페이지에 지원자 이하루의 업무 품질을 확인 할 수 있는 프로젝트와 포트폴로오를 첨부했습니다. 보시면 (상세한 업무 내용은 생략)  


  업무에 관련된 내용을 설명해 드렸으니, 이번에는 인간관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직원들이 퇴사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 1~2위에 안에 ‘인간관계’가 있다는 거 아시죠? 나가게 한 사람이 잘못이다. 나간 사람이 약해빠진 거다. 서로 잘잘못을 가리겠다며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요. 전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다녀도 조용히 다니고, 나가도 조용히 나갑니다. 제가 에니어그램(Enneagram) 검사를 받아보니 5번 유형이더라고요. 이런 유형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요. 저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술은 못 마셔도, 술 취한 사람 얘기는 잘 들어주거든요. 

  아마 회사 차원에서는 묵묵히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는 직원일 겁니다. 저와 같은 유형이 그렇다고 하네요.
  쓰고 보니 이 글도 그다지 몰입도 있는 자기소개서가 되지 못했지만, 지원자 이하루가 어떤 사람인지는 솔직하게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

     

  00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글에 쓴 이하루보다, 더 괜찮은 이하루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물론 판단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담당자님의 몫이겠지만요.     


  고맙습니다. 300개가 넘는 이력서 중 하나인, 자기소개서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다음 이력서는 5분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한 후 읽으시길 바랍니다.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쓰이기 위해 썼다가 쓴맛(불합격)을 본 자기소개서지만, 공개합니다.

  다른 분들은 이렇게 쓰지 마시고, 꼭 합격하시라고요.

매거진의 이전글 100번째 불합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