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선택되었다

의미부여 최소화 전략으로 고통 줄이기

by 탐구인간

흔히 사후세계에 대해 상상할 때, 천국에 가면 행복할 것이고 지옥에 가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는 이유는 ‘죽음’과 '번식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전자 보존이라는 본능에 따라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기쁨과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낀다. 긍정적 감정은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을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생존과 번식에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슬픔, 공포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부정적 감정은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것을 회피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감정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 행동도 궁극적으로는 생존과 번식 추구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죽음'과 '번식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해서 동일한 상대적 빈도로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과 번식을 위해 굳이 노력해야 하는 동기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을 추구하고 불리한 것을 회피하도록 유도하는 도구로서의 모든 감정, 생각, 행동도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사후세계는 그 세계에서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추가적인 번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후세계에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관계없이 불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모든 감정, 생각, 행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기존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새롭게 사후세계로 가게 됨으로써 사후세계 내 유전자의 상대적 빈도는 달라진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존 세계 사람이 죽는 것에 사후세계 사람이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므로, 이와 관련해서 사후세계 사람이 어떤 행동을 추구할 동기를 갖기는 어러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 물론 이러한 가정들은 어디까지나 학문적 영역이 아니라 흥미로운 상상의 영역이다.



고통의 이유

‘삶은 곧 고통이다’라는 말은 짧지만 가장 본질적인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 따르면 유전자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생존은 선행 조건이며, 번식은 생존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이다. 즉 개체의 수명을 일부 단축시킬 위험성이 있더라도 번식을 증진시키는 유전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될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개체의 수명을 늘리는 데 기여하더라도 번식을 감소시키는 유전자라면 그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질병, 노화, 통증, 정신적 고통 등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질병이나 노화의 일부는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지만 번식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유전자로 인해 발생한다. 통증과 정신적 고통 그것을 통해 개체가 생존에 위협적인 상황을 빠르게 인지하고, 회피하며, 재발을 방지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번식을 늘리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유전자가 선택된다.


문제는 이러한 자연선택이 개체의 행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느끼더라도 자연선택은 이를 신경 써주지 않는다. 그저 고통을 활용해서라도 생존을 유지함으로써 번식하는 데 유리하다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다면 살아있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듯 고통도 유전자 보존의 측면에서 이득이 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런데 과도한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살고자 함이 오히려 죽음을 부르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상처는 오래 남는다

‘상처받았다’라는 표현에서의 정신적 상처는 ‘부정적 감정이 동반된 기억으로서 현재의 심리까지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다양한 '상처들'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부정적 감정이 동반된 경험은, 긍정적 감정이 동반된 경험보다 더 오래,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위험 회피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부정적 감정이 긍정적 감정보다 더 높은 중요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긍정적인 감정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생존이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을 추구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바로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 위험 요소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경우, 상황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정적 감정은 긍정적 감정보다 민감성이 높으며, 부정적 감정과 연관된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그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와 미래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정신적 상처가 오래 남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우울증과 같은 불편을 초래하더라도, 위험을 회피하지 못해 바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불편을 느끼는 개체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유전자 관점에서의 설명이다.



예측 모델로 보는 우울과 불안

인간의 정신 작용을 예측 모델로서 이해하는 예측 처리 이론(Predictive Processing Theory)을 활용하여 우울과 불안을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울은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부정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미래도 부정적일 것이라는 예측을 고정하고, 그러한 예측을 반박하는 새로운 근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이다.


불안은 미래를 예측할 때 새로운 부정적인 근거를 지나치게 많이, 끊임없이 받아들여 불확실성에 압도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우울과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적절한 예측을 수행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핵심이다.



의미부여 최소화 전략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어쨌든 ‘살아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유전자 보존의 측면에서 ‘생존하고 있다면’ 이미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번식 성공, 즉 자식을 가지지는 못했더라도 그것이 많은 비용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일단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큰 과제를 수행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적용한다면 굳이 정신적 고통에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정신적 고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깊게 파고들어 추가적인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


또한, 삶 전체에 대해서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경우라면, 의식적으로 의미 부여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의미는 다 필요 없고 어차피 살아있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행복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덜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Mauss et al.(2011, 재인용: 데이비스 롭슨, 2023)).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차야 하고, 앞으로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는 예측은 적절한 예측이 아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며, 삶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해 볼 수 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적절한 예측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인 예측이 정신적 고통을 줄이는 시작점이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고통을 느낄 때마다 아래의 생각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서 무의식으로 체화한다면,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고통을 느끼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살아있으면 된 것이다.


* 참고 문헌

R.네스, G.윌리엄즈 (1999).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최재천 옮김). 사이언스북스. (원서 출간 1994년)

리사 펠드먼 배럿 (2017).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최호영 옮김). 생각연구소. (원서 출간 2017년)

데이비드 롭슨 (2023). 『기대의 발견』(이한나 옮김). 까치글방. (원서 출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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