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기일이 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대명절, 설날의 장례식

by 황수민

대명절, 설날의 장례식


26년 새해가 밝고, 대명절인 설날에 큰 외삼촌의 장례를 치렀다. 69세로 생을 마감한 큰 외삼촌의 장례는 나에게 삶의 의미를 또 한 번 일깨웠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많은 장례를 치러왔다. 16살 때, 제일 가까운 44세의 나이로 추석 당일 생을 마감한 아빠의 장례 이전에도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가까운 어른들의 죽음을 겪어왔다.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의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번의 이별을 지나온 셈이다.


아직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온전히 건강한 몸으로 눈을 뜨는 하루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진다. 내가 만난 사람들, 나의 상사들은 나의 아빠보다, 나의 큰 외삼촌보다 더 오래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이미 보너스를 받고 있는 시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벌고,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고,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기 위해 평생을 살 것처럼 아둥바둥한다. 그 과정에서 양심을 내려놓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고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흐름이고, 오히려 존경받고 찬사를 받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나조차도 그런 삶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이질감을 느낀다. 장례를 많이 치르고, 입관을 여러 번 보며 하얀 베에 싸여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고인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었든, 얼마나 찬란했든, 혹은 그렇지 않았든 결국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 한 줌의 가루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명절은 더 이상 단순한 기쁨의 날이 아니다. 추석은 아빠의 기일이 되었고, 설날은 외삼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사람들은 명절을 만남의 날로 기억하지만, 나에게 명절은 하나둘씩 기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의 명절은 늘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함께 섞여 있다.


나와 같은 시간을 지나온 동생마저 명절마다 말한다. 이번 명절만큼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요양원의 담임목사로서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의 장례예배를 수없이 드려온 사람이다. 장례지도사와 친분이 쌓일 만큼 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가 죽음을 초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오빠를 떠나보내는 순간, 엄마는 누구보다 크게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겪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덧없다.


그게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그 기일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나 역시 인생의 중요한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말씀하셨다. 죽음을 보면 아둥바둥 살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는데, 막상 살아가다 보면 또 그렇게 아둥바둥 살게 된다고.


그래, 삶은 거기에 있다.


나는 가끔 나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묻는다.

내일 죽는다면 뭐 하고 싶어?


너랑 같이 바다에 가서,

네가 그렇게 크게 놀라던 그 큰 파도를 보고 싶어.


그래, 삶은 거기에 있다.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삶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삶의 순간에는 죽음도 미래도 없다. 삶은 지금에 있다.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조차 우리는 현재에서 그 감정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 나는 현재를 낭비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선택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을 뿐이다.


의미가 없더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 어떤 삶도 소중하며 가치있으며 그릇되지 않는다. 아침의 햇살과 흐린 날의 수분을 머금은 축축한 구름, 봄날의 향기와 여름의 뜨거운 공기, 가을의 무르익은 시간과 겨울의 차가운 공기까지,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찬란하다는 걸.


삶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고, 때로는 사치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선에서 보면, 내가 이렇게 느끼고 살아가는 이 순간조차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고 사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자랑도, 특별함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과 지금을 살아가는 순간 사이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할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금 여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