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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msikY Mar 15. 2021

엄마의 감자탕

맛을 몰랐던 철없는 시절을 회상하며 쓴 반성문

엄청 먹었다.


우량아는 아니었지만 사춘기가 오면서부터 입이 트이고 위가 열리며 주체할 수 없이 먹었다. 한번 열려 버린 위는 24시간을 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고, 한계가 없는 듯 들이 붓는대로 소화를 시키곤 언제나 목구멍을 향해 '더더더'를 외치고 있었다. 이런 부지런한 위 덕분에 아침 인사는  '안녕히 주무셨어요'가 아닌 '밥 줘'가 되어 버렸고. 이른 아침부터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애석하게도 나의 식욕에 바빠진 건 엄마였다. 자식의 식욕을 채워주기 위해 엄마는 매주 한아름씩 장을 보며 냉장고를 채워놓았고, 그런 엄마와 경쟁을 하듯 나는 빠르게 냉장고를 비워갔다. 그 당시 세상에서 맛 없는 것이란 없었고, 무엇이든 먹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단, 한가지만 빼고. 그건 바로 감자탕


어느 날 저녁 낯선 뼈다귀가 식탁에 놓여졌다. 뻘겋고 거무튀튀한 국물에 약간의 기름이 자르르하게 흐르고 있었고, 불쑥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뼈다귀가 노란 감자를 품고 있는 낯선 형태의 무엇이었다.


'엄마 이게 뭐예요?'

'감자탕이라는 거야. 엄마가 시간이 있으면 푹 고아서 맛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퇴근하고 급하게 하느라 맛이 좀 덜하네. 그래도 엄마 정성이니까 맛있게 먹어'


낯선 음식에 낯가림을 하며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뻘건 국물부터 맛을 보았다. 후루룩! 맛이 나쁘지 않았다. 가볍고 개운한 식감이었고 매콤하고 칼칼한 여운을 남긴채 후루룩 먹혀졌다. 좀 더 칼칼한 맛을 위해 후추통을 들고 탈탈 털어내어 맛을 끌어올려 보니 낯선 개운함으로 맛이 더욱 좋아졌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알싸한 음식과의 새로운 만남, 시작은 화끈하고 아찔해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외모만 보고 판단해 잘못 쏘아버린 큐피트의 화살일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먹어보려 험상궂게 생긴 뼈다귀에 젓가락을 갖다 대 보았을 때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꿈쩍도 안하는 살코기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강력한 젓가락의 찌르기에도 그저 아무일 없는 듯 부스러기 하나 흘려주지 않고 온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살코기들의 대응에 순수한 침략자는 한발짝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다급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턱하니 집어 입에 우겨넣었지만, 뻣뻣한 살코기들은 입안에서도 그대로 남아 나의 이빨을 괴롭히며 더욱 나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결국 씹는 노동을 견디지 못한 나는 뼈다귀를 내려놓았다.

단, 한입. 살코기의 희롱에 빈정이 상한 나는 감자탕은 원래 이렇게 뻣뻣하고 고된 음식이라 나랑은 안맞는다 생각하며 큐피드의 화살을 거두어 들였고, 감자탕이라는 메뉴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 후 회사에 취직하기까지 감자탕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이따금씩 '탕에 소주' 한잔 하자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 때마다 가볍게 먹기 좋은 순대국을 찾았고 감자탕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잊은 줄 알았던 아찔한 맛은 날씨 좋은 아침 우연치 않은 기회로 나를 찾아왔다.


그 날은 날씨도 좋고 오랜만에 평일 연차를 써 한가롭게 청계천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평소에도 잘 닦인 길보다는 골목길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변화를 좋아하는 터라 물길이 흐르는 시원힌 길을 뒤로 하고 골목 안으로 불쑥 들어가 버렸다.

흥미로운 골목의 냄새가 전해졌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을지로의 향기. 그 향에 취해 비틀비틀 하염없이 걷다가 낯선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자국'


익숙한 듯 낮선 그 이름에 이끌려 '드르륵'하고 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 이른 낮시간이라 그런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오래된 샷시가 비벼대며 내버린 소리에 식당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나는 머슥하게 구석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훔치기 시작했다. 메뉴판에는 식사와 안주가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필시 밤에는 술꾼을 불러모으는 호롱불같은 가게임이 분명했다. 이리 저리 살피던 나는 밖에서 보았던 '감자국'을 주문하고 가게를 이리 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그만 평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양념통과 오래된 달력들의 정겨운 조화가 좋았고 대낮부터 술 한잔 들이키는 주당들의 다툼이 듣기 좋았다. 그런 풍경 사이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지옥불인가?'


 붉다 못해 검게까지 느껴지는 진득한 국물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광경을 보자니 지옥불이 있다면 이런 형상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은 마치 나쁜 사람을 기다리는 지옥불마냥 검붉게 부글 거리고 있었고 부글거리다 터져나간 진국들이 가마솥을 더럽히며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오래 보자하니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커져갔고,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 턱 하니 솥하나 걸고 장사하는 사장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지 새삼 궁금해지게 되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사진출처 @glam_table

기다리던 감자국이 나왔고, 습관처럼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가르고 한 숟갈 떠 보았다


후룩! 목젖을 가르고 들어간 그 국물은 험상궂은 인상과는 다르게 맑고 경쾌했다

붉은 색깔마냥 매울 것 같았던 국물은 가벼운 매콤함만 남기고 시원하게 넘어갔고, 입안은 개운한 느낌이 가득 남았다. 매콤함이 가시기 전 옆에 있던 포슬한 감자를 뭉텅 썰어 국물과 함께 삼켜 보았다. 잘 삶은 감자가 까끌함 없이 뭉개졌고 구수한 감자와 매콤한 국물의 조화가 고급스러웠다. 참 좋다. 맛이 참 좋다. 다시금 몇 번을 정신없이 국물을 들이키고는 젓가락을 들어 보았다. 어렸을 적 나에게 거친 기억을 남겨준 뼈다귀는 어떻게 변했을까. 오늘은 나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줄까 궁금해하며 젓가락으로 살포시 찔러 보았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찌르기가 무섭게 떨어져 나가는 살점을 보니 예전의 기세는 온데 없었고 노년의 노련함만 남은 노신사의 교양처럼 깔끔하고도 묵직하게 국물 사이를 헤집고 나왔다. 따각 따각! 젓가락으로 뼈다귀 사이를 헤집어 가며 살점을 덜어내는 동안 저항이라고는 없었고 뼈다귀와 젓가락의 경쾌한 울림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떨어져 나간 커다란 살점을 집어 입에 넣어보았다. 물컹하지만 단단하고 고소한 살들에 칼칼한 양념이 잘 베어 고기만으로도 한그릇의 탕을 먹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점, 두점 그리고 국물에 적셔 후룩! 그렇게 허겁지겁 뼈다귀를 개워내고 나니 국물과 밥이 남았고, 드디어 결정을 해야할 때가 왔다.


말까? 그냥 먹을까? 참 별 것 아닌 것의 고민인 듯 하지만, 국물의 깔끔한 맛을 그대로 느끼기 좋아한다면 밥과 탕을 따로 먹어야만 한다. 밥의 녹말 성분이 탕에 녹아 눅진해진 탕을 먹는다면 그것도 맛있겠지만, 탕의 온전한 맛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고 한번 바뀐 국물은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냥 먹기로 했다.


밥 한술, 탕 한술 먹다 보니 작은 밥공기는 바닥을 드러내며 더는 줄게 없다며 손가래 쳤고, 나는 시원한 깍두기를 한입 베어물며 격렬했던 만남의 끝을 준비했다.


배가 불러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올 때쯤 엄마의 감자탕이 생각났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뻣뻣했을까. 그 해답은 엄마의 대화에 있었는데 그 때는 그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 끓임'


모든 것이 오래 끓인다고 좋지는 않지만 적어도 감자탕은 예외였던 것 같다. 국물인지 살인지 모르게 푹 익혀 내야 탕 안에서 물아일체 되어 깊고 진한 맛을 내는데, 서로 엉켜버리기도 전에 불을 끈 감자탕은 각자의 개성이 강하여 먹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불을 일찍 꺼버린 엄마의 감자탕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나에게 부들부들한 감자탕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에 치여 일과 가사를 함께 해야 하다 보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을테고, 조금만 더 끓이면 더 맛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배고파하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주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맛은 애정으로 채워 한그릇 가득 주었는데, 그 때 나는 그런 요리를 이해할만큼 성숙되지 못했었다. 고기 한점 베어물고는 먼발치로 밀어낸 감자탕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갑작스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그 때로 돌아간다면 한솥 걸린 뻣뻣한 살들을 엄마가 보는 눈 앞에서 다 뜯어내며 맛있다를 연발하고 싶어졌다.  

하, 어머니...


포만감의 행복과 옛기억의 미안함이 솥 안의 감자탕처럼 한데 엉킨채로 가게를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엄마의 손길처럼 '괜찮다.괜찮다' 다독이며 내 귓가를 스쳐갔다. 그 바람을 느끼며 나는 오래도록 누르지 않았던 번호를 꾹꾹 눌러보았다. 신호가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을지로 뒷 골목을 걷다 보면 익숙하지만 낮선 '감자국'이라는 메뉴를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감자탕보다는 개운한 이 맛에 이미 주변의 주당들에게는 익숙한 식당이랍니다.


[동원집]

주소 : 서울 중구 을지로 11길 22

메뉴 : 감자국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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