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msikY Mar 19. 2021

진국의 맛

먹어봐야 겪어봐야 알게 되는 '진국'

‘오늘은 어떤 일을 해야할까?’


아침이라 뻑뻑하게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데굴 굴리며 커피 한모금 넘기고 있는데 별안간 날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난 번에 얘기했던 레포트 정리 다 됐나?”


한동안 다른 팀 프로젝트에 빠져 눈길한번 없다가 어제 스치듯 외근 준비하라고 한마디 던진게 다인데 그걸 ‘지난 번’이라고 표현을 하나?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부장의 시간은 빨리 가고, 나의 시간만 더디 갔나 보다.


설마 어제 오더를 오늘 아침에 가져오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나에겐 아직 경제적 자유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아침 시간을 불살라 레포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워낙 촉박한 일정이라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한장 한장 얹어 갔고, 그래도 회사 밥은 날로 먹은게 아닌지라 부족한 시간에도 흉 보이지 않을 정도의 레포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몇 개의 오타는 있었지만 나의 짬이 묻어난 레포트는 한번에 통과되었고, 출력하기가 무섭게 짐을 싸 외근을 나섰다. 다행히 외근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 가까운 거리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업무처리도 잘 진행되어서 모처럼 기분 좋고 한가한 점심시간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뭐 먹지?’


매일같이 차가운 식판 밥 먹던 곳을 벗어나 고급스러운 활기가 넘치는 공간에 오니 괜스레 따뜻하고 흔하지 않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옆으로 흘깃 보니 오랜만의 휴식에 부장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고, 이리 저리 둘러보며 맛있는 점심을 탐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사람인데 본능을 탐닉하여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한 친근감이 몰려왔다.


‘이 참에 맛있는 거 같이 먹고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최고로 맛있는 집을 소개해 주겠어!’


휴대폰을 꺼내 최근에 검색창에서 보고 눈독을 들이던 핫한 맛집들을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손가락 질 끝에 가장 핫하고 고급진 곳을 찾아냈고, 이른 시간이라 지금 가면 웨이팅 없이 입장이 가능할 것 같았다. 고급진 동네에서 맛있는 한끼를 먹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배부름이 가득 차오르는 듯 행복감이 밀려왔다. 저기, 부장님!


‘설렁탕 먹으로 감세. 이 근처에 오랜 단골이 있어서 말이야’


나의 손가락 질이 무색하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무엇인가 탐닉하는 것 같던 그 눈동자는 오랜만에 가는 단골집의 상호명이 기억나지 않아 이리 저리 둘러보던 것이었고, 그 오랜 맛을 먹는다는 생각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맛있는 한끼로 동질감을 만드려 했던 나의 계획은 발 밑으로 넣어 꾹꾹 눌러버렸고 다시금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관계로 돌아왔다. 설렁탕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의 외근에 설렁탕이라니!


사진출처 : @glam_table

약간의 시간을 헤맨 후에 도착한 건물에는 커다란 간판만 있을 뿐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가게라면 1층에 입구가 있어 그 안의 상황이 대충은 보이기 마련인데, 건물 곳곳에 간판이 달려 있을 뿐 식당의 존재는 어딘가에 감춰져 있어 묘한 불안감을 자아내었다. 이런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는 나를 알아챘는지 부장님은 옷깃을 잡아 지하로 데리고 내려갔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빌라의 대리석 계단들을 내려가며 마치 산책하기 싫어하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였다. 가기는 싫지만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 하지만 지하의 문이 열리고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 연민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보글보글보글보글'


사진출처 : @glam_table

앙 다물고 있던 조개의 입이 밝고 영롱한 진주를 토해내듯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의 세상은 압도적이었다. 들어가자 마자 식탁과 의자가 보이는 흔한 설렁탕집과는 달리 커다란 오픈 주방이 먼저 보였는데, ‘여기는 고기를 진짜 삶는 설렁탕집입니다’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넓게 펼쳐진 은색 판 위에 커다란 고기 덩어리들이 턱턱 마구잡이로 얹어져 있었고, 그 뒤로는 뽀얀 설렁탕을 품고 있는 커다란 솥 들이 끓고 있었다. 고기와 육수로 가득 채워진 주방은 주방 자체로 맛있어 보였다.


주방을 지나 구석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 늦은 아침을 따뜻한 국물로 채우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선 노신사 분들만 있었고, 직장인으로 보이는 건 우리 테이블 밖에 없었다. 먼저 온 분들은 하나같이 뚝배기 한 그릇씩을 잡고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김이 나는 국물을 한술 한술 들이키고 있었다. 설렁탕의 역사만큼 오래 사신듯한 노신사 분들은 오랜 업력을 자랑하듯 새하얀 국물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토핑하여 한껏 즐기고 있었는데, 입안이 까끌한 사람들은 깍두기를 넣고 우걱우걱 씹어 맛을 개워냈다. 식욕 앞에 고상함도 내려놓고 즐기는 그 모습을 보니 허기가 느껴져 메뉴판을 찾았다.

 

사진출처 : 로지한 일상

‘탕과 수육’

한때 가짜 설렁탕이 화제가 되며 가짜 설렁탕 구별법들이 다양하게 나온 적이 있었다. 목적은 진짜 고기를 삶은 곳과 첨가물을 섞어 색만 내는 곳을 가려내기 위함이었는데, 여러 얘기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은 ‘수육 파는 집’이었다. 고기를 직접 삶으면 수육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수육 파는 집이 진짜다’라는 것인데, 대게는 맞지만 일부는 틀림이 있어 아주 맞지는 않는 설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 말을 신뢰했고, 그런 나에게 ‘탕과 수육’이 함께 있는 메뉴판은 오픈 주방에 이어 가게에 대한 신뢰를 한껏 높여주었다.


하지만 그 노동의 대가가 녹아서인지 서민음식 꼬리표를 달고 있음에도 절대 서민적이지 않은 가격은 외식가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만원 한장으로는 설렁탕밖에 선택할 수 없는 메뉴판. 고가의 메뉴판에 눌려 잠시 소심한 메뉴 선택을 고민했지만, 화려했을 나의 점심을 망친 감정이 떠올라 가장 비싼 ‘꼬리곰탕’으로 보상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설렁탕. 뭐 먹을텐가?’

‘네? 저도 설렁탕이요. 여기 설렁탕 두개 주세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먼저 내던진 부장님의 두번째 선공에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꼬리곰탕이라는 네 글자가 마음속에서 심하게 요동쳤다.


‘날 꺼내달란 말이야! 꼬리곰탕이라고 외쳐달라고!’

‘나대지마 곰탕아. 난 아직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한 월급쟁이란다’


애써 마음을 추스리고는 설렁탕이 나오기까지의 어색한 시간을 침묵으로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설렁탕 두 그릇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센불에 몸을 던졌을 설렁탕은 아직도 화가 식지 않았는지 뚝배기 밖을 넘나들 듯 보글보글 끓으며 성을 내고 있었다. 그런 설렁탕을 바라보던 부장님은 깍두기 국물을 넣어 일각에 설렁탕을 제압했다. 하지만, 맑은 국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벌겋게 변해버린 남의 설렁탕 국물을 바라보는 것마저 속이 상해 고개를 숙이고 내 그릇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 @glam_table

뽀얗다라는 단어가 이것보다 잘 어울리는 사물이 있을까? 하얗고 뽀얀 국물을 한 술 떠 후룩! 들이켜 보았다. 구수하고 담백한 따끈함이 목을 타고 넘어가 곧 내 안에 안착했고, 그 따끈한 국물이 지나간 나의 몸도 함께 따끈해지기 시작했다. 한술, 그리고 또 한술, 툴툴대던 날 달래기라도 하는 듯 구수한 국물들이 내 속을 덮어갔고, 그 따끈한 위로에 나는 그만 순한 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들이키다 보니 그 밑에 있던 하얀 국수 사리가 보였다. 설렁탕이라는 음식이 본디 새하얀 도화지 같아서 자기가 먹고 싶은대로 그려먹을 수 있듯이 국수 또한 뚝뚝 끊어 밥과 함께 먹을수도 있고, 탕면처럼 먹을수도 있는데, 앞에 부장님을 보니 밥과 함께 말아 숟가락 위에 깍두기 하나 얹어 후룩!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쌀과 밀의 탄수화물 조합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같아지고 싶지 않다는 괜한 반항심에 국수를 한껏 집어들어 한입거리로 삼겨 넘켜버렸다. 심심한 국물이 잔뜩 베인 국수가 꿀떡 넘어갔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말아 먹을 껄!


평소 국물이 탁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설렁탕은 예외였다. 다른 탕들과 다르게 밥과 함께 먹어야 더욱 진한 맛이 올라오는 이 국물은 자연스럽게 밥을 불렀고, 다만 나처럼 탁하거나 불은 밥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공기밥을 이등분하여 반을 먹저 먹고 나중에 추가 밥을 마는 요령을 부렸다. 이렇게 먹게 되면 대충 씹어 넘긴 밥알들이 국물과 함께 꿀꺽 넘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식도를 유랑하며 탱글함을 뽑낼 때 나는 그 발랄함을 즐겼다.


몇 번의 숟가락 질을 하다 보니 야생의 본능이 고기를 불렀고, 얇게 썰린 고기 한 점을 들고 입에 넣어 작은 포만감을 더했다. 그렇게 뚝배기 그릇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다. 한가득 비워낸 뚝배기만큼 포만감이 밀려오자 문득 혼자가 아니란 것이 생각났다. 아차!


‘맛있네 맛있어'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마친 부장님은 몇 번 보지 못했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아하니 내가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동안 본인도 본인의 방식대로 뚝배기에 집중하고 있던게 틀림 없어 보였다. 부드러운 왈츠에 온 몸을 내던졌던 사람처럼 온 얼굴이 땀범벅이 된 부장님은 냅킨으로 한껏 땀을 닦으며 맛있네. 맛있어.를 연신 외쳤다. 물어본 사람도 없는데 혼자 식사평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흘깃 보여졌다. 말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설렁탕이 날 살린 것 같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우루루 몰려와 큰 홀은 금새 만석이 되었다. 웅성대며 주문하는 무리를 뒤로 하고 아까는 끌려가듯 내려갔던 계단을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왔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고, 즐거운 식사까지 더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늘 식사 맛있게 먹었네. 덕분에 여유 있고 맛있는 식사를 오랜만에 하게 된 것 같아’


배가 불러서일까. 부장님의 한마디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벽을 세운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먹은 설렁탕처럼 ‘진국’일지 모르는데 어렵다는 핑계로 먼저 멀리하면서, 그 가치를 못 알아본 내 잘못이 아닌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진국'일지 모르는 부장님, 앞으로는 제가 깍두기처럼 시원하게 잘 보필하겠습니다

더 뜨겁게 힘내 보시죠!




30년 전통의 우작설렁탕을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봤어요. 저는 추운날 가게 되어 따끈하게 몸을 데우고 나온 기억이 있는 가게예요

힘없고 기운 빠지는 날 설렁탕 한 그릇 어떠세요?


상호명 : 우작 설렁탕

위치 : 서울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6길 7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감자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